'우리가 한반도 주인'이란 인식은 중요하지만 강대국 이익을 외면하고 미래를 결정할 수 없다
지금 그 이익의 공통분모가 '北核 제거'다
 

선우정 사회부장
선우정 사회부장
한국에서 '민족'이란 말은 마력을 지녔다. 역사 때문이다.

근대 언어 대다수가 그렇듯 '민족(民族)'도 일본 학자의 영어 'nation' 번역을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인식이 다른 언어와 달랐다. '사회' '권리' '철학' 등은 지식 습득에 한정됐지만 '민족'엔 의지와 감정이 더해졌다. 이 언어가 러일전쟁(1904~05년) 전후에 보급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나라가 망해갔다. '국민'이란 언어는 공동체를 포괄하는 언어로서 기능을 잃었다. 그 자리를 '민족'이 대신했다. '민족'은 수십년 동안 부르는 것만으로 울컥하는 절망과 희망의 언어였다.

2018년 4월 판문점 선언 1조 1항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남북 합의문에 나오는 단골 표현이다. 2000년 6·15 공동선언문도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말로 1조를 시작했다. 2007년 10·4 공동 선언 역시 '우리 민족끼리 정신에 따라 통일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나간다'는 문장이 실렸다. 100년이 넘었지만 '민족'이란 언어는 여전히 큰 위력을 발휘한다. 세계적으로 특별한 경우다. 식민지 피지배와 분단이 연이어 발생한 탓이다.

'민족'과 '민족주의'의 의미는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른 길을 갔다.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강대국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로 변했다. 일제를 통해 한국이 경험한 대로다. 2차 대전 이후 강대국에서 '민족주의'가 금기어가 된 것은 그것이 침탈을 뜻했기 때문이다. 약소국의 민족주의는 수세적이었다. 신채호는 민족주의를 '타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는 주의', 한 걸음 나아가 '아족(我族)의 국(國)은 아족이 주장한다는 주의'로 해석했다. '민족자결주의' '민족평등주의'에 해당한다. 신채호의 언어처럼 한국에서 '민족'은 순결한 언어다. 침탈이 아니라 희생의 언어다.

한국은 '민족'을 복음처럼 여긴다. 문재인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한반도 문제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며 "남북 관계의 발전은 북·미 관계 진전의 부수 효과가 아니다"고 했다. 이런 표현도 있었다. "광복은 결코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선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이겨낸 결과였다." '한반도의 주인은 우리'란 말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전제로서 '광복은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은유(隱喩)'일지는 몰라도 '사실'이 아니다. 광복은 미국의 승전으로 주어졌고 그 결과 선열의 투쟁이 결실을 이룬 것이다. 대통령은 '민족'을 앞세우다가 '사실'까지 바꿨다. 의식 과잉에 의한 역사 수정은 지금 한국 근현대사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친지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뜻밖에 많다. '우리 민족끼리' 북한의 핵과 한국의 경제력을 합치면 단숨에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해피엔딩의 결정판이다. 그건 현실이 아니다. 선열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는데도 현실의 광복은 밖에서 온 것과 비슷한 이치다. 한반도는 강대국의 이해가 얽혀 있다. 강대국 이익을 중시하고 함께 미래를 협의해 한반도에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결론을 이끌어가야 한다. 지금 강대국 이익의 공통분모에 '북핵 제거'가 있다. '우리 민족끼리' 무언가를 하려면 이 전제를 해결해야 한다. 대북 특사단이 가는 것도, 남북 정상회담을 다시 여는 것도 '우리 민족끼리'가 아니라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라고 믿고 싶다.

북한은 '민족'이란 언어의 마력을 악용해 왔다. "남조선 인민을 해방한다"며 전쟁을 일으켜 민족을 살육한 그들이다. 그 후엔 같은 민족이라며 돈을 달라고 위협했다. 이제는 민족을 앞세워 한국을 대북 제재에서 이탈시키려 한다. 노동신문, 조선중앙통신은 연일 "우리 민족끼리 뜻과 힘을 합쳐 판문점 선언을 이행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요즘 북한의 태도를 보면 대미 접촉에 앞서 그들이 왜 한국을 끌어 들였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문 대통령에게 지지율 80%를 넘길 기회를 왜 줬는지 윤곽이 잡힌다. 그들 눈엔 '민족'이 아니라 '민족의 돈'만 보인다. 지금 한반도에서 '민족'은 허상이다.

'우리 민족끼리' 한반도 미래를 결정할 수 없다. 독일도 이를 전제로 노력해 통일을 이뤘다. 정부는 꿈이 아니라 현실을 말해야 한다. 그래야 내일의 현실이 달라진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04/20180904037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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