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相禹

김대중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방문한 임동원 특사에게 북한당국은 ‘6가지 합의’를 선물로 들려 보냈다. 우리 대통령이 원하던 경의선 복원의사를 밝혔고 동해북부선 연결도 원칙합의를 보았다. 그동안 북한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중단됐던 남북한 간의 몇몇 회담장에 북한이 다시 돌아오겠다고도 했다. 물론 그 대가로 우리 측은 식량지원과 전기공급 등을 ‘인도주의’와 ‘상부상조’라는 이름으로 약속했다.

이번 합의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없다. 어떤 형태이든 남북한 간의 접촉기회가 많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기대할 것도 없다. 합의된 내용은 모두 실천됐다 하더라도 남북한 관계의 본질적 개선에는 크게 도움이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남북한 교류협력이 의미를 가지려면 북한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비유하자면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려면 물을 붓기 전에 뚫린 구멍부터 막아야 하는 것과 같다. 북한이 개혁·개방의 뜻을 세우기 전에 교류협력을 한다고 무슨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번 남북합의는 김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동상이몽의 합작품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지금 부시 미국 행정부에 쫓기고 있다. 미국은 북한정부에 대량살상무기 생산과 미사일수출 포기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과는 다르다. 벼랑끝 외교가 통하지 않는 상대다.

북한이 거부하면 미국은 직접 제거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미국의 강압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서 평화 이미지를 높여야 할 필요가 절박하다. 그 선택이 남북한 관계개선을 위한 가시적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고, 가장 손쉬운 방법이 한국정부가 애타게 희망하는 ‘회담 재개’ 동의이다.

김 대통령은 남북관계 개선을 재임 중 최고의 치적으로 삼기를 원한다. 김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많은 양보를 해가면서 북한의 협력을 끌어내려 애써왔다. 그 결과 남북정상회담도 성취했고 여러 가지 가시적 협력관계도 성사시켰다. 그러나 북한은 작년부터 등을 돌리고 더 이상 남북관계를 진전시키지 않았다. 김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해에 경의선 복원 하나라도 이루려고 애써왔다. 이번 남북합의는 김 대통령으로서는 큰 성과이다.

이번 합의를 계기로 남북한 관계가 개선의 길로 들어설까?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북한은 아직도 체제의 개혁·개방에 전혀 뜻을 두고 있지 않고 오직 평화 이미지 제고에만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각종 가시적 접촉은 지속할 것이나 본질적 관계개선은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방문 의사 발표 등 평화공세의 수위를 높일지 모른다. 그러나 과거 선례를 보면 북한이 자기체제 변화와 관련한 약속을 지킨 적이 없다.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책임을 우리 측에 넘기고 빠져버린다. 결국 우리는 또 다시 북한의 평화공세에 들러리 서주는 꼴이 되고 말 공산이 크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북한체제의 개혁과 개방이다. 북한 주민도 우리처럼 자유와 복지를 누릴 수 있기를 바라고, 모든 국민이 남북한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북한은 개혁·개방엔 뜻이 없고 아직도 공산혁명이라는 시대착오적 망상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시적·상징적 남북교류만을 현란하게 펼친다고 무엇이 이뤄지겠는가? 오히려 우리 국민들이 북한의 허상에 속아 통일이 임박한 것 같은 환상을 갖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북한이 행동으로 전쟁포기를 입증하게 하는 등 남북공존 체제를 제도화하는 일부터 추진해 나가고, 이것이 이뤄질 때 교류협력을 시작하자. 경의선 복원, 금강산 관광이라는 신기루를 쫓다가 사막에서 길을 잃을까 걱정이다. ‘한 여름밤의 꿈’에서 깨었을 때를 미리 대비해 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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