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준용 정치부 기자
안준용 정치부 기자

2000년 7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ARF(아세안지역안보회의)에 북한 대표단이 처음 참석했다. 6·15 남북 공동 선언 직후 대화 기류를 타고 이정빈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과 백남순 외무상이 사상 첫 남북 외교장관 회담을 가졌다. 당시 북측 대표단 5명 중 한 명이 현 북한 외무상인 리용호 참사였다. 리용호는 북한이 참여하는 유일한 다자 안보 협의체인 ARF를 통해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린 뒤 북 외교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2016년 외무상이 된 리용호는 지난해 ARF에선 거의 '왕따' 취급을 받았다. 국제사회 제재로 중국·러시아와 개최국 필리핀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180도 달랐다. 남북, 미·북 대화 덕분에 사흘간 중국·베트남·인도네시아·인도·태국·EU·뉴질랜드 등 총 11개국을 만났고 싱가포르와는 별도 회담을 가졌다. 지난해 인사도 제대로 못 받던 그가 각국 외교장관과 환담하고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악수하는 장면은 북한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줬다.

ARF에서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4일 연설에서 미국에 '미·북 공동성명의 동시·단계적 이행'을 요구하며 "우리만이 일방적으로 먼저 움직이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반도 종전선언과 함께 대북 제재 완화도 주장했다.

하지만 리용호는 강경화 외교장관과의 남북회담은 끝내 피했다. 강 장관은 올 6월 공개적으로 "ARF를 계기로 리 외무상과의 회담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ARF 환영 만찬에선 그를 쫓아가 회담을 청했다. 하지만 리용호는 "응할 입장이 아니다"고만 했다. 강 장관은 마지막까지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리용호는 11년 만의 남북 외교장관 회담을 거부했다.

강 장관은 남·북·미·일·중·러 외교장관 가운데 가장 서둘러 ARF 개막 나흘 전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당초 15개국과 양자 회담을 추진했으나 리용호와 같은 12개국만 만났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2일 예정됐던 한·중 회담을 하루 미루더니 3일 리용호를 먼저 만났다. 왕 부장은 작년 ARF 때는 강 장관에게 "사드 배치가 양국 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했었다.

5일 강경화 장관이 ARF 결산 브리핑에서 꼽은 3대 성과는 '신남방정책에 대한 아세안의 지지 재확인'과 '남북 외교장관 회동' '한반도 주변국과의 소통 강화'였다. 공식 회담이 무산된 상태에서 사실상 조우(遭遇)에 가까운 리용호와의 수 분간 만남을 외교 성과로 삼은 것이다. 그러면서 "리용호 외상께서는 진중하고 굉장히 내공이 깊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ARF 무대에서 20년간 잔뼈가 굵은 북 외무상을 향한 덕담일 수 있다. 하지만 기대감만 갖고 나섰다 북에 퇴짜 맞은 우리 외교 수장의 발언치고는 너무 안이해 보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05/20180805021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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