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 빼놓고 합의문 작성한 北, 이제 와서 "강도적 요구" 비난
美는 '口頭 약속' 믿었겠지만 길고 지루한 협상의 늪에 빠져
 

임민혁 정치부 차장
임민혁 정치부 차장

"북한과 협상할 때 '해석 여지'가 있는 합의문에 사인하는 순간 사실상 게임은 끝이다. 북한이 나중에 합의를 깨면서도 오히려 '약속을 어긴 건 너'라고 큰소리칠 구실을 주는 것이다."

과거 북한과 직접 마주 앉아봤던 한·미 협상가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북한이 합의문에 어떤 문구를 집어넣거나 빼려고 할 때는 확실한 목표가 있다. 이 과정에서 북한 협상가들의 노력은 집요하고 치밀하다.

오바마 행정부 때인 2012년 미·북은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유예(모라토리엄)하고, 그 대가로 미국이 식량 원조를 한다'는 '2·29 합의'를 발표했다. 당시 미국이 제시한 합의문 초안에는 '위성 발사를 포함해…(including satellite launch)'라는 문구가 포함돼 있었다. 기술적으로 위성 발사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같다. 하지만 북측은 끝까지 이 문구를 빼자고 요구해 관철했다. 합의 발표 2주 후 북한은 장거리 로켓을 쏘아 올린 뒤 "평화적 우주개발을 위한 위성 발사이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다"고 주장했다.

부시 행정부 때인 2007년 2·13 합의 때도 비슷했다. 북한은 핵무기·물질·시설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신고한다'고 합의했지만, '검증(verification)'이라는 단어는 절대 넣을 수 없다고 버텼다. 핵 사찰에서 '검증'과 '신고'는 동전의 앞뒤 관계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라는 불량 국가의 말을 순순히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검증 절차는 당연히 따라붙는다. 미국은 이에 따라 북한의 핵 신고 뒤 검증을 요구했으나 북한은 "합의문에 없는 검증을 왜 강요하느냐"며 판을 깼다.

당시 미국이 넋 놓고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미국 협상가들은 합의문에 넣지 못한 부분을 구두(口頭)로 확인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믿었다. 미 측이 "미사일 실험을 유예하면 위성 발사도 못 하는 거다" "신고에는 검증이 뒤따른다"고 상기시키면, 북한 대표들이 "알겠다"는 뉘앙스로 모호하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미 측은 이를 '동의했다(agree)'는 의미로 해석하고 합의문에 사인한다. 하지만 이후 북한의 약속 위반에 대해 항의하면 북측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했지, 우리가 언제 동의했느냐"고 반박했다.

이런 북한의 '함정'에 빠지는 일은 되풀이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6·12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전후로 벌어지는 상황은 과거와 판박이다. 이번에도 북한은 '검증'을 합의문에 넣기를 극구 반대했다. 북한의 노림수를 뻔히 아는 성 김 주필리핀 미국 대사가 북측과 8차례나 실무 협상을 하면서도 타협하지 못한 이유다. 결국 시간에 쫓긴 '정치인'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정상회담 당일 새벽에 북측 요구를 받아들였다. 합의문에는 '완전한 비핵화'라는 문구만 들어갔다. 검증이 빠졌다는 비판 여론에 폼페이오는 "'완전한 비핵화'에는 검증이 포함돼 있다. 북측과 그런 얘기를 다 했다"고 말했다. 대북 협상 전문가들이 고개를 가로젓는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이후 상황은 예상대로다. 세 번째 북한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 폼페이오의 뒤통 수에 대고 북한은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강도적인 요구만 했다"고 비난했다. 북한은 싱가포르 합의문을 흔들며 "수뇌 상봉 정신을 지키라"고도 했다. 향후 비핵화 협상이 어떤 모습일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대가는 이토록 크다. 트럼프 행정부가 길고 지루하고 험난할 북핵 협상을 헤쳐나갈 인내심과 의지가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16/20180716033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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