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가 협의해 결정한다"고 뒤에 따라붙는 말의 이중성
1999년 평북 금창리 때처럼 다른 테이블에서 다루진 않는지
 

권대열 논설위원
권대열 논설위원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오늘부터 평양에서 실질적 핵 협상을 벌인다.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살려 비핵화와 남북 공존의 길을 열어야 한다. 나라와 민족의 앞날이 걸린 미·북 협상에서 걱정되는 부분 중 하나는 주한 미군 문제다. 미국이 "협상 대상이 아니다"라고 몇 차례 밝히면서 지금은 관심에서 다소 벗어난 듯하다. 하지만 미국 쪽 신호를 보면 실제론 '테이블 밑'에서 다루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가시질 않는다.

주한 미군에 대한 최근 미국 정부 코멘트에는 "북한과 협상할 대상이 아니다. 한·미 간 문제다" 하는 표현이 반복된다. 문제는 이 말이 갖는 이중성이다. 언뜻 "주한 미군 철수는 없겠구나"라고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북한과 협상해 철수하진 않겠지만 한·미 합의로 할 수는 있다"는 뜻도 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지난 행적은 그런 의심을 하게 한다. 작년 7월 스티브 배넌 당시 백악관 수석 전략가는 "중국이 북핵을 막고 미국은 대가로 주한 미군을 철수하는 협상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키신저 전 국무장관도 '주한 미군 철수 카드'를 조언했다. 실제 미·북 협상 국면이 열리자 매티스 국방장관은 "(주한 미군은) 북한과도 논의할 이슈의 일부가 될 것이다. 어떻게 될지 추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북한 김영철과 만난 뒤 '주한 미군 문제를 논의했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거의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답했다. 미·북 정상회담 전후에도 이어졌다.

회담 직전 매티스 국방장관은 싱가포르 국제회의에서 "주한 미군은 협상 대상이 아니다"면서도 "한·미가 협의를 통해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다음 날엔 "주한 미군은 어디 가지 않는다"고 했지만 "한·미 사이의 일"이라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김정은과 만나고 나온 트럼프 대통령 입에서 "주한 미군을 돌아오게 하고 싶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병력을 빼내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 이러니 '협상 대상 아니다'보다 '한·미가 다룰 일'이라는 데에 무게가 실린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미국으로선 동맹 정책과 국제사회의 신뢰 등을 고려할 때 주한 미군을 협상 카드로 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북한 역시 수십 년간 "조선반도 비핵화는 핵무기를 가진 군대가 한반도에서 없어지는 것"이라고 해왔다. 북한과 실제 협상했던 관계자들은 "북한이 미군 철수 요구 없이 핵 폐기만 할 리가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쌍방의 원칙이 충돌할 때 외교에서 흔히 쓰는 방식이 별도 테이블로 나누는 것이다. 미국은 '테러범과 협상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론 뒤로 대가를 지불하는 경우가 있다. 북핵 문제도 그렇게 다룬 적이 있다.

북한이 1990년대 말 평안북도 금창리라는 곳에 대규모 지하 시설 공사를 했다. 미국은 핵 시설로 보고 제네바 합의에 따라 사찰을 요구했다. 북한은 "일반 시설일 뿐"이라며 "보려면 대가를 내놓으라"고 했다. 미국은 "보상은 절대 안 된다"고 맞섰다. 긴 협상 끝에 사찰에 합의했고, 합의문에는 대가(代價)에 대해선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론 인도적 협력이란 '다른 테이블'을 만들어 식량 60만t, 농업 개발 지원용 씨감자 1000t 등을 무상 제공했다. 그러고는 대외적으로 "대가는 없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했다. 주한 미군 문제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북한과 직접 협상했던 전직 관계자들에게 미·북이 주한 미군을 건드리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물어봤다. "트럼프가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면 이미 미·북 간에 얘기된 것 같다"는 이도 있었고, "이제 우리에겐 북핵과 주한 미군이 다 있는 상태, 아니면 북핵과 주한 미군이 다 없는 상태 중 양자택일만 남았을 뿐"이라는 이도 있었다.

미국이 이런 자세라면 한국 정부 태도가 중요하다. 청와대는 지난 5월 주한 미군 철수 가능성 논란이 일자 "대통령 말"이라며 "평화협정이 체결돼도 계속 주둔하면서 동북아 유지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정부 인사 중엔 과거에 '미군 철수'를 주장했던 이들도 있다. 그러나 국정을 다루면서 주한 미군의 유용성과 필요성, 국민 불안 등을 느끼고 이런 입장을 정했을 것이다. 이 입장을 미국에 분명하게 전했고, 이를 관철하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04/20180704043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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