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지난 6월 12일의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과 대한민국 좌파는 크게 만족한 듯한데 우파는 낙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파가 기대하고 원했던 것은 물론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 폐기)였다. 그런데 공동성명서에 CVID가 없지 않은가? '비핵화'라는 문구가 CVID를 포괄하는 것이라고 트럼프는 주장하지만 준비 과정의 논의를 감안하면 들어있어야 한다. 이 사안은 악당 국가가 인류를 파괴할 능력을 보유하느냐 박탈당하느냐에 관한, 그리고 한국의 생사가 걸린 문제다.

미국과 한국의 대다수 언론과 유튜버의 논조는 트럼프가 별로 얻어낸 것도 없이 김정은에게 너무 많이 양보하고 띄워주었다는 식인 듯하다. 반면 트럼프가 김정은을 회유해서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도구로 쓰게 되어 큰 것을 얻었다고 보는 유튜버도 있다. 시진핑을 불신하고 중국의 야욕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후자는 매우 솔깃한 주장이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달래는 과정에서 북한이 힘을 얻으면 남한을 삼키려 하지 않겠는가. 이미 김정은은 트럼프와 시진핑에게 받은 칙사 대접을 후광 삼아 청소년 수만 명을 골병 들이는 집단체조를 부활했다.

어쩔 수 없이 트럼프의 '수완'에 기대를 걸어보는 내 처지가 매우 처량하다. 그에게서 정치 고수의 풍모를 찾아보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허풍과 횡설수설이다. 가장 소름 끼치는 것이 김정은과 만나서 '영광스럽다'는 말, 그리고 김정은을 '명예로운 사람(an honorable man)'이라고 한 것이었다. 반어법적으로 한 말 같지도 않으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문호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보면 6~7세 꼬마도 명예를 어떻게 지키는가를 엿볼 수 있다. 초등학교 신입생 스티븐은 아버지가 '절대로 고자질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덩치 큰 상급생이 자기를 진창 에 밀어서 쓰러뜨리는 바람에 안경이 깨져서 숙제를 할 수 없었지만, 선생이 안경이 깨졌다는 것은 거짓 핑계라고 몰아치며 혹독하게 체벌해도 고자질하지 않는다.

80년대에 주사파들은 다른 학생운동 조직을 포섭하려다가 실패하면 정보기관에 그 조직의 정보를 제공해서 일망타진되게 했다고 한다. '명예' 개념을 모르는 사람들이 경영하는 세계의 백성이 된 것이 슬프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25/20180625029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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