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혜 도쿄 특파원
김수혜 도쿄 특파원

6월 4일로 평창올림픽이 끝난 지 100일이 됐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지형과 판세가 때론 분(分) 단위로 변했다. 중요한 움직임과 중요하지 않은 움직임을 구별하는 요령이 생겼다. 밤낮없이 속보 알람이 뜰 때 첫 줄이 '트럼프가…' '시진핑은…' '김정은이…'로 시작하면 바로 봤다. '아베가…' '문재인 대통령이…'로 시작하면 나중에 봤다. 의식적 행동은 아니었다. 순간순간 내린 판단이었다.

앞의 셋은 한반도 운명에 직구(直球)를 날릴 수 있다. 아베와 문 대통령은 그렇지 못하다. 어느 한 방향으로 부채질을 하거나 물꼬를 틀 수 있을 뿐이다. 아베 주장대로 압박을 계속할지, 문 대통령 설득대로 대화를 시작할지, '결정'은 미·중·북이 내렸다.

이런 정치 역학을 압축하는 말이 '코리아 패싱' '재팬 패싱'이다. 트럼프·시진핑·김정은이 아베 말을 먼저 듣고 청와대 뜻을 건성으로 물리치면 '코리아 패싱', 그 반대면 '재팬 패싱'이다.

평창올림픽까지는 우리가 '코리아 패싱'을 걱정했다. 트럼프 취임 후 첫 15개월간, 아베는 트럼프와 보름에 한 번꼴로 직접 통화하거나 얼굴을 봤다.

'평창' 이후 뒤집혔다. 이제 일본이 '재팬 패싱'을 고민한다. 트럼프는 지난 3월 아베에게 묻지 않고 미·북 회담을 결단했다. 발표 직전 도쿄에 전화해 "신조, 굿 뉴스가 있다"고 통보했을 뿐이다. 그 시각 이미 백악관 다른 방에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미·북이 한국 중재로 사상 처음 만나기로 했다"고 발표하고 있었다.

그걸 고소하게 여긴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보여준 게 지난달 24일 펼쳐진 '트럼프 쇼'다. 우리 말 듣고 미·북 회담을 전격 결정했던 트럼프가 우리에게 묻지 않고 "그 회담 안 한다"고 걷어찼다가 도로 테이블에 앉았다. 우리 힘으로 앉힌 게 아니었다.

북한이 "어떤 대화건 하겠다"고 황망하게 엎드린 게 주효했거나, 아니면 트럼프의 협상술이 원래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거나였다. '북한 비핵화'란 판 자체가 미·중·북 셋이 치는 포커이고, 한·일은 갤러리였다.

다만 갤러리에도 차이가 있다. 우리는 제 목숨이 걸린 도박을 지켜보는 '인질 겸 갤러리'다. 일본은 '옆집 인질극'이 자기한테도 위협이 될지 몰라 앉아 있을 뿐 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코리아 패싱과 재팬 패싱이 같은 줄 안다. 군사 전문가 미치시타 나루시게(道下德成) 정책연구대학원대학 교수가 "아무래도 한국이 '나쁜 평화' 시나리오로 갈 것 같다"고 걱정했다. 북핵을 못 막은 뒤, 미·중은 다른 문제 신경 쓰고 일본은 북한과 수교할 때 갤러리 중 한국만 남아 핵을 가진 북한에 뜯기며 살 가능성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04/20180604029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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