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북 정상회담을 일주일 앞두고 북핵 문제에 관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발언이 종잡을 수 없게 되고 있다. 트럼프는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을 만나고 나서 북핵 폐기 시점에 대해 "솔직히 그들(북한)에게 천천히 하라고 말했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열흘 전만 해도 "(북핵 완전 폐기는) 짧은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일괄 타결될 것"이라고 했었다. 김영철에게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라는 기존 핵 협상 원칙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최대 압박이란 용어를 더는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난 3월 말 시진핑을 만날 때만 해도 "최대한 제재와 압박은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유지돼야 한다"고 했었다.

트럼프의 바뀐 발언은 모두 김정은이 원하는 방향이다. 김정은은 김영철 방미(訪美) 기간에도 러시아 외무장관을 불러 '단계적 비핵화'를 강조했다. 옛날처럼 비핵화 단계를 동결→신고→검증→폐기 등으로 쪼갠 뒤 단계마다 제재 해제나 경제적 지원 등의 보상을 챙기겠다는 전술을 그대로 고집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에 북이 핵 폐기를 지키지 않는다고 지금 수준의 제재로 다시 되돌린다는 것이 가능하겠나.

트럼프가 김영철에게 'CVID'를 언급하지 않고 '천천히 하라'고 한 것은 '단시간 내 북핵 완전 폐기'라는 기존 원칙에서 물러나 김정은이 원하는 '단계적 비핵화'를 사실상 받아들인 것일 수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단계적 비핵화라도 핵 폐기만 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지난 25년 동안 실패한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다.

트럼프 입장에선 김정은의 완강한 거부로 '단기간 내 북핵 완전 폐기'가 어려우면 11월 미국 중간선거 때까지 북핵 이벤트를 여러 단계로 나눠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는 게 이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북이 ICBM만 포기해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내 정치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미·북 회담이 여러 번 열릴 수 있고 12일 싱가포르 회담에서 아무것도 서명하지 않을 것"이란 언급은 이런 계산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5100만 한국민의 안위가 달린 북핵 문제가 정치인들의 이벤트용으로 변질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측이 어려운 사람이다. 앞으로 또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트럼프 대통령이 하고 있는 말에 대해선 미국 언론과 전문가 거의 모두가 "과거 실패를 반복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최악의 경우 트럼프가 싱가포르에서 김정 은과 '한반도 비핵화'라는 정치적 선언을 하고 그 대가로 대북 제재를 풀어주는 수순에 들어가면 북은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된다. 문제는 아무도 이를 막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한국 정부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국민이 바로 보고 제대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어떤 협상을 하더라도 '선(先) 핵 폐기, 후(後) 제재 해제'라는 대원칙만은 지켜져야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04/20180604029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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