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북 정상회담이 다시 궤도에 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7일(현지 시각) 미국과 북한이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실무 협상 중이란 사실을 확인하고 “북한이 언젠가 경제적이고 재정적으로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북한의 ‘극도의 분노와 공개적인 적대감’을 이유로 회담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한지 3일 만이다.

그러나 회담 준비가 순항할지는 미지수다. 회담 취소의 근본적 이유인 북한의 비핵화 방식을 놓고 양국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일본 교도통신은 28일 미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를 목표로 북한에 핵탄두의 국외 조기 반출을 요구하고 있지만, 북한은 이에 난색을 표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미사일 일부만 먼저 반출하는 방안을 미국 측에 제안했다”고 전했다.

◇ 조급해진 김정은…김계관 담화·남북 정상회담으로 트럼프 마음 돌려

트럼프 대통령이 마음을 돌린 데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기존의 ‘벼랑 끝 전술’을 버린 영향이 컸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트럼프 대통령의 미·북 정상회담 취소 편지가 공개되고 바로 다음날인 25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낸 담화에서 “우리는 항상 대범하고 열린 마음으로 미국 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며 “우리는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음을 미국 측에 다시금 밝힌다”고 했다. 김 부상은 이날 ‘위임에 따라 담화를 발표한다’며 사실상 김정은의 의중이 담겼다는 점을 시사했다.
 
문재인(오른쪽)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5월 26일 오후 판문점 북한 지역에 있는 통일각에서 제 2차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 청와대

김정은은 그길로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연락을 취해 26일 제 2차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다. 문 대통령은 27일 “김정은 위원장이 그제(25일) 오후 만나자고 제안해 흔쾌히 수락했다. 친구 간의 평범한 일상처럼 만남이 이뤄졌다”고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강수에 놀란 김정은이 미·북 정상회담 재추진을 위해 ‘SOS’를 친 것으로 읽힌다.

북한 관영 언론의 ‘신속한’ 남북 정상회담 보도가 이를 뒷받침한다. 조선중앙통신이 촬영해 홈페이지에 올린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단체 사진은 인물들이 선명하지 않고 중심이 맞지 않는다. 한쪽으로 기울기까지 했다. 급하게 처리하다보니 완성도가 떨어지는 사진을 그대로 내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은의 다급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정은이) 6월 12일로 예정돼 있는 조미(미·북) 수뇌회담(정상회담)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문재인 대통령의 노고에 사의를 표하면서 역사적인 조미 수뇌회담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피력했다”고도 전했다. 북한 매체가 미·북 정상회담 날짜인 ‘6월 12일’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북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열려야 한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
 
2018년 5월 27일자 북한 노동신문 1면. 전날 열린 제 2차 남북 정상회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 노동신문
◇ 양국 비핵화 입장차 조율이 관건…美 ‘CVID’ vs 北 ‘단계적 비핵화’

우여곡절 끝에 대화의 문은 열렸지만 미·북 정상회담이 무사히 성사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양국이 북한의 비핵화 방식을 놓고 합의하기가 쉽지 않아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CVID를 원칙으로 하는 반면, 북한은 ‘단계적 비핵화’를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2일 문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 자리에서 “비핵화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며 “우리가 원하는 특정한 조건들이 있다.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회담을 안 할 것이고 나중에 할 수 있다”고 했다. ‘특정한 조건’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언급하지 않았으나 CVID를 의미한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 역시 이날 “회담의 목표와 목적은 완전하고 전면적인 비핵화”라고 거듭 밝혔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16일 “정상회담의 목적인 CVID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전날 담화를 통해 CVID와 ‘선(先) 핵 포기, 후(後) 보상’을 맹비난한지 하루만에 미국의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볼턴 보좌관은 그동안 모든 핵무기를 폐기해 미국에 옮긴 후 보상하는 ‘리비아식 핵폐기’ 방식을 제안해왔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2018년 5월 22일 오후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의 단독회담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북한은 핵 신고·사찰·폐기·검증 등을 여러 단계로 쪼개서 협상하고, 각 단계마다 체제 보장과 경제적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이 강경 담화를 통해 고도화된 핵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피력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핵보유국임을 강조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최대한 많은 지원을 이끌어내고, 보다 확실한 체제 안정을 보장받으려는 것이다.

김계관 제 1부상은 지난 15일 담화를 통해 “핵 개발 초기 단계였던 리비아를 핵 보유국인 우리와 대비하는 것 자체가 아둔하다”며 일방적 비핵화 협상이 아닌 핵보유국 간 군축 협상을 하겠다는 속마음을 내비쳤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도 지난 24일 담화에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을 겨냥해 “우리를 고작해서 얼마 되지도 않는 설비들이나 차려놓고 만지작거리던 리비아와 비교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아둔한 얼뜨기인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고 비난했다.

◇ 北, 비핵화 의지 밝혔다지만…文 대통령, CVID 언급은 피해

비록 북한이 미국에 매달려 대화를 재개하는 모습이 됐지만, 김정은이 회담 전까지 갖고 있는 패를 모두 내보일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북한 관영 매체들은 제 2차 남북 정상회담을 일제히 1면 톱기사로 보도하면서도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5월 27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전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가진 제 2차 남북 정상회담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문 대통령도 김정은이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를 약속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을 피했다. 문 대통령은 “그에 대해선 여러 번 밝혔기 때문에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비핵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는 북·미 간에 협의할 문제이기 때문에 앞질러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미 정계에서는 회의론이 확산되고 있다. 마르코 루비오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은 27일 ABC 방송에 출연해 김정은이 전 세계를 상대로 쇼를 하고 있다며 “(김정은이) 실제로 비핵화를 원하지 않고 궁극적으로도 비핵화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독재자인 김정은이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도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제프 플레이크 공화당 상원의원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그는 이날 NBC 방송에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 비핵화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이라는 점에 회의적이었다”고 전했다.

제임스 클래퍼 전 미국 정보국장(DNI)은 27일 CBS방송에 출연해 북한이 비핵화의 조건으로 미국의 ‘핵우산’ 제거를 요구할 수 있다고 짚었다. 핵우산은 핵무기가 없는 나라가 핵보유국과 동맹을 맺어 국가의 안전보장을 도모하는 것으로, 미국은 1978년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한국에 대한 핵우산 제공을 약속하고 북한 도발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미·북 정상회담 개최가 촉 박한 일정과 준비 부족으로 성사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셉 윤 전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뉴욕타임스(NYT)에 “트럼프 대통령은 어느 정도 합의 없이는 회담에 나가지 않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그런 합의에 도달할 시간이 과연 있느냐다”며 “현재로서는 (비핵화에 대한) 진전을 합의해낼 수 있을지에 미·북 정상회담 개최 여부가 달려있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28/20180528010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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