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 단체를 처음 조직한 마르크스주의자…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 도쿄대 명예교수]

'인권 공세'로 나오면 핵실험 같은 초강경 조치 취할 필요 있다.
그들 시선을 핵 문제로 돌리는 것. 우리가 핵 위기 고조하면
미국은 별수 없이 '先 핵 後 인권' 방식으로 돌아설 것이다.
핵으로 인권 덮어버리는 것… 결국 북한의 의도대로 이뤄졌다.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77)씨의 개인 연구실은 도쿄의 고지마치(麴町)역에서 걸어서 7분 거리였다. 열 평이 채 안 되는 좁은 공간이었다. 찻물을 끓이며 그는 말했다.

"도쿄대 교수 퇴직금으로 마련했습니다. 아내는 6년 전에 세상을 떴습니다. 내가 북한 인권 운동을 하느라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알기로 문재인 대통령도 민주화 운동을 했지 않습니까. 그런 분이 김정은과 포옹을 하면서 북한의 인권유린에는 눈감는 게 난 이해가 안 됩니다."
 
오가와 대표는
오가와 대표는 "북한 인권 얘기하지 않으면 한국 민주화의 성과는 의미가 없어진다"라고 말했다. /도쿄=최보식 기자

그는 1994년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창립했다. 북한 인권 단체의 시초였다. 그의 도움을 받아 2년 뒤 한국에서도 '북한인권시민연합'이 만들어졌다. 1999년에는 처음으로 '북한 인권·난민 문제 국제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북한 인권 문제가 국제적으로 공론화되면서 유엔의 북한인권보고서와 북한인권결의문이 나올 수 있었다.

"전쟁 위기까지 갔다가 남북 정상이 만나 화해 무드로 바꾼 것은 평가할 만합니다. 그러나 '판문점 선언'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 중단 등을 명시했습니다. 북한 정권이 가장 즐거워하는 일을 해준 겁니다. 전 세계가 다 주목하는 인권이나 강제수용소에 관해서는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었습니다. 문 대통령이 강제수용소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북한과 관계 개선을 할 수 없고 정상회담도 성사가 안 되니까 그렇겠지요. 모를 리야 있겠습니까.

"옳지 않다고 봅니다. 문 대통령은 역사 공부가 부족해요. 한국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게 뭐라고 해명할 수 있습니까. 문재인 정권이 북한 인권을 얘기하지 않으면 한국 민주화의 성과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북한 주민들에게도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명색이 민주화 운동을 했다면서 어떻게 강제수용소 문제에 침묵할 수 있습니까."

―북한을 잘 달래야 하는 현 정권의 고충이 있지 않겠습니까?

"지난 3월 말 와세다대학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 문정인 특보가 연사로 나왔습니다. 질문 시간에 내가 '북한과의 회담에서 인권과 강제수용소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 않는가?'하고 물으니, 문 특보는 '상대가 싫어하는 의제는 올리지 않는다. 인권 문제는 NGO 중심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인권 문제를 중시하는 국제 정치의 흐름에도 맞지 않는 답변입니다. 더욱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정권 요직에 있는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옵니까.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그의 전공은 동아시아근대사다. 1960년 평양에서 출간된 '조선철학사'를 읽고는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한국과의 인연이다. 도쿄여자대학에 재직하던 지명관(池明觀·일본 잡지에 'TK生' 필명으로 한국의 군사독재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썼음) 선생의 주선으로 조선문화강좌를 했고, 1978년에는 연세대 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도쿄대 재학 시절 학내 투쟁에 참여했고 교수가 된 뒤로 사회주의 활동을 했습니다. 사형선고 받은 김지하·김대중의 석방 구명 운동을 일본에서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는 문화대혁명, 베트남전쟁,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지, 북한은 관심권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였습니다."

그는 서재에서 문고판 책을 꺼냈다. 1966년 8월 노동신문 논설을 모아놓은 '자주성을 옹호하자'라는 제목의 일본어 번역본이었다.

"이 노동신문 논설에는 '공산주의자는 자기 머리로 생각해야 한다' '자기 힘을 믿어야 한다' '맑스레닌주의는 행동의 지침이다'라고 했습니다. 모두 진리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듬해 북한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유일 수령 사상'이 채택된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대대적인 사상 점검과 함께 강제수용소가 늘어났고, '자주 주체'의 나라가 김일성 신격화의 나라가 됐다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1993년 8월 21일 도쿄 시내의 한식당에 초대받아 충격을 받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식당 여주인의 세 아들은 1960년 말 북송선(北送船)을 탔습니다. 북한이 가족의 방문을 허용한 것은 1979년부터였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방북했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다시 가서 뇌물을 주고 알게 된 것은 두 아들이 강제수용소에 10년째 갇혀 있고 한 아들은 두들겨 맞아 숨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본에 돌아온 그녀는 이를 호소하지 못했습니다.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10년 넘게 한(恨)이 쌓였다가 그날 처음 이를 증언한 겁니다."

그 자리에서 평양방송의 일본어 아나운서로 활동하던 오빠를 둔 다른 재일동포의 증언도 있었다. 오빠가 정치범으로 체포돼 숨진 사실을 알고는 조총련에 2000만엔을 바치고 올케를 구출했다. 고왔던 올케는 늙은 노파가 돼 있었고 손톱은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북한을 지지해 온 저로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뒤 수용소를 탈출한 강철환·안혁·안명철씨 등의 체험 수기가 일본어로 번역됐습니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쓴 해나 아렌트는 일당(一黨) 지배와 비밀경찰, 강제수용소를 전체주의의 지표라고 했는데, 가장 잔인한 형태의 전체주의가 북한에서 실현된 겁니다. 북한의 공포 체제를 받쳐주고 있는 게 강제수용소입니다. 무엇보다 북송 조선인 중 상당수가 유일 수령 사상에 불만을 표시하다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재일조선인 귀국 사업(북송 사업)'은 1959년 말부터 1984년까지 이뤄졌다. 북한과 일본 적십자사 공동으로 추진됐고, 재일동포 약 9만3000명이 북송선을 탔다.

"1967년 일본 적십자는 손을 뗐지만, 북송 사업은 일본 언론과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계속됐습니다. 당시 나도 지지했습니다. 정말 반성합니다. 진짜 문제는 북송된 이들의 인권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겁니다. 일본 언론도 이들의 인권유린 실태를 다룬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앞장섰던 일본공산당의 기관지도 그렇습니다. 내가 1994년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시작했을 때 조총련계 사람들이 몰려와 '내정간섭이다'라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오가와씨의 개인 연구실에서.
오가와씨의 개인 연구실에서.

―북한 강제수용소에는 12만명이 갇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핵화 협상이 타결되고 개혁·개방이 이뤄지면 북한의 인권 상황도 개선되지 않을까요?

"정권 유지를 하려면 주민 통제가 더 심해질 것으로 봅니다. 강제수용소가 있는 한 주민들은 자유롭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폭파 쇼를 한 풍계리 핵실험장 근처에 '화성 강제수용소'가 있습니다. 이 수용자들이 핵실험장을 만들 때 동원됐습니다. 만약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에 대한 사찰이 이뤄진다면 화성 강제수용소의 사찰도 요구해야 합니다."

―선생은 2008년 '노 펜스(No fence·북한 수용소를 없애는 행동 모임)'라는 단체도 만들었지요?

"2007년 6자 회담에서 북한이 핵개발을 단념하면 체제를 인정해주는 걸로 합의한 데 놀랐습니다. 주변국에서 북한 체제를 인정한다면 강제수용소와 인권유린도 인정해준다는 얘기인데, 그건 옳지 않습니다."

―지금 미·북 간에 시끄러워도 정상회담은 열릴 겁니다. 미국은 비핵화를 받고 경제 보상과 체제 보장을 약속할 것으로 봅니다. 북한 인권은 회담 의제에서 빠질 겁니다.

"나는 젊어서 '미 제국주의 반대'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북한 인권 운동을 하면서 미국관(觀)이 좀 바뀌었습니다. 미국이 두 얼굴을 갖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는 제국주의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인권을 지키려고 하는 얼굴이었습니다. 만약 미·북 회담에서 트럼프가 인권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그는 한낱 장사꾼이 분명합니다. 미국 안에서도 비판에 직면할 겁니다."

최근에 출간된 태영호 공사의 증언록 '3층 서기실의 암호'를 보면, 2001년 페르손 스웨덴 총리가 평양에서 김정일과 협상할 때 의제에 없던 인권 문제를 꺼냈다고 한다. 태영호는 통역 자격으로 배석했다.

〈페르손 총리가 "핵 문제가 설사 해결된다고 해도 인권 문제가 남아 있는 한 북한은 국제사회에 편입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자, 김정일은 "우리와 서방은 인권의 사회정치적인 개념부터 다르기 때문에 합의가 쉽지는 않으리라 본다. 대화와 소통을 통해 차이점을 줄여나가면 인권 문제도 결국 해결할 수 있다. 대화에 응하겠다"고 맞받았다. 그 뒤 김정일은 강석주 외무성 1부상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유럽이 인권 대화를 하자는 것은 결국 우리 내부를 파보겠다는 것인데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인권은 국권이다. 유럽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미국 강경 보수파를 눌러놓을 수 있다. 유럽을 얼려(속여) 넘기는 대책을 연구해야 한다."

이에 북한 외무성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법원, 감옥, 수감자들을 지금부터 준비하겠다. 만일 미국과 유럽이 연합해 인권 공세로 나온다면 핵실험과 같은 초강경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시선을 핵 문제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핵 위기를 고조시키면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선(先) 핵 후(後) 인권' 방식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핵으로 인권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40일 뒤 브뤼셀에서 북한 인권과 관련된 예비 접촉이 있었다. 북한은 외국인의 인터뷰에 응할 수 있는 정치범 수감자들을 선별해 사전 연습까지 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2년 끌다가 인권 문제를 없던 일로 만들었다.>

북한 정권은 생각보다 훨씬 노련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27/20180527026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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