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된 1번 뺀 2→4→3번 갱도順, 전문가 없이 5개국 기자만 참관
北 "핵군축 위한 중요 과정" 주장

北, 기자들 불러 폭파쇼까지 했지만… 美北정상회담 취소로 의미 퇴색
NYT "모든 갱도 폭파 여부는 몰라", 우리정부는 "비핵화 첫 조치" 평가
 

북한이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5개국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핵실험장의 갱도와 부대시설을 폭파했다. 지난달 20일 노동당 중앙위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결정한 핵실험장 폐기를 34일 만에 이행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 외신에선 모든 갱도가 실제 폭파된 것인지 확실치 않다는 보도도 나왔다.

북한은 이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 17분까지 5시간 17분 동안 풍계리 핵실험장의 4개 갱도 중 3곳을 2, 4, 3번 갱도 순으로 폭파했다. 1번 갱도는 북한이 지난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한 후 방사능 오염 탓에 폐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핵실험장 부속 시설인 관측소 2곳, 단야장(鍛冶場·갱도 설비용 작업장), 생활건물 본부 등 5곳, 군(軍) 막사 2개 동도 폭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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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24일 5개국 취재진 30명이 참관한 가운데 풍계리 핵실험장 갱도와 부대시설을 폭파했다. 지난달 20일 핵실험장 폐기를 공언한 지 34일 만이다. 북한은 2006년 이후 작년 9월까지 이곳에서 총 6차례 핵실험을 진행했다. 사진은 23일 민간 위성업체 디지털글로브가 촬영한 폭파 전 풍계리 핵실험장 일대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이날 북한은 핵무기연구소 명의 성명에서 "투명성이 철저히 보장된 핵시험장 폐기를 통해 공화국 정부의 평화 애호적 노력이 다시 한 번 확증되었다"며 "핵시험 중지는 세계적인 핵군축을 위한 중요한 과정"이라고 했다. 이는 핵보유국으로서 향후 비핵화 협상에 임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날 폐기 행사에는 당초 약속한 핵(核) 전문가는 빠졌고, 한·미·영·중·러 등 5개국 기자 30명만 지켜봤다. 현장에 있었던 영국 스카이뉴스 아시아의 톰 체셔 특파원은 "산을 올라가 약 500m 거리에서 폭파 장면을 지켜봤으며 '3, 2, 1'이라는 카운트다운과 함께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고 했다. 그는 "먼지와 열기가 취재진을 덮쳤고 폭발음도 매우 컸으며 나무로 만든 관측소를 산산조각 냈다"고 했다.

AP통신은 "북한의 핵실험장 폐기는 미·북 정상회담의 긍정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김정은의 '웰컴 제스처'"라면서도 "이것이 되돌릴 수 없는 조치는 아니며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하는 진짜 비핵화까지는 더 많은 진지한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날 폭파는 총 다섯 번의 핵실험에 이용된 2번 갱도부터 시작됐다. 취재진이 핵실험장 인근에 도착한 직후, 핵실험장 북쪽에 위치한 2번 갱도에서 오른쪽으로 200m쯤 떨어진 곳에서 북한 군인 4명이 폭파 준비에 착수했다. CNN은 "(폭파 전) 35m 전방에서도 잘 보이는 축구공만 한 폭발물들이 갱도에 놓여 있었다"고 했다. '핵무기연구소 부소장'이라고 신원을 밝힌 북한 측 당국자가 사전 브리핑을 했고, 오전 11시쯤 기자들에게 "촬영 준비 됐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취재진이 "준비됐다"고 답하자 "3, 2, 1"이란 카운트다운 후 '꽝' 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현장에 있던 취재진은 핵실험장이 있는 해발 2205m의 만탑산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2번 갱도 입구 쪽에서 흙과 부서진 바위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전했다. 입구 쪽에서 첫 번째 폭음이 들렸고, 안쪽 더 깊은 지점에서 2차례 정도 폭음이 더 울렸다고 한다. 이어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4번 갱도와 3번 갱도, 부속 시설, 군 막사 등이 순차적으로 폭파됐다. 김정은은 지난달 남북 정상회담에서 3·4번 갱도가 "건재하다"고 했다. 이날 북한 핵무기연구소는 "2개 갱도가 이용 가능한 수준에 있었다는 것이 국제기자단 성원들에 의해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부 외국 언론은 이번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쇼"나 "연극"이라고 표현했다. 미 CBS뉴스 벤 트레이시 기자는 "북한은 특정한 목표로 소수 기자만 초청했다"며 "핵실험장을 폐기했던 걸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모든 갱도가 폭파된 건지 확실치 않다"며 "폭발 규모와 정도를 육안으로 확인해 줄 외부 전문가가 없었다"고 했다.

우리 정부는 이날 오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 후 "북한의 핵실험장 폐기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첫 번째 조치임을 평가한다"고 밝혔다. 노규덕 외교부 대변인은 "추후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미·북 정상회담을 급작스럽게 취소하면서 핵실험장 폭파의 의미가 크게 퇴색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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