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의 달인' 트럼프 대통령, '가망없는 거래' 판단에 회담 취소
'核 문제 일시 해결' 환상도 깨져… 어디로 갈지 모를 벼랑끝 상황
 

강인선 워싱턴지국장
강인선 워싱턴지국장

싱가포르의 일부 유명 호텔은 미·북 정상회담이 예정된 다음 달 12일 전후 예약을 받을 때 환불 불가에 전액 선납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 호텔 직원은 "정상회담 개최 여부는 그야말로 '도박'이라 미리 돈 안 받고는 예약 못 해준다"고 했다.

최근 워싱턴의 한국 전문가들 사이에서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은 일기예보처럼 하루하루 전망이 달라지고 있었다. 23일까지만 해도 '정상회담을 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에서 무엇을 얼마나 이룰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퇴로는 더 불투명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미·북 모두에게 정상회담을 성사시켜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 만난 두 명의 전직 미 외교관은 회담 성사 가능성을 높게 봤다. 북한의 말은 거칠지만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을 보면 정상회담 의지가 약화된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김계관 외무성 제1 부상의 담화나 최선희 부상의 정상회담 취소 위협 발언 역시 정상회담 국면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외무성 인사들이 나섰다는 점에서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고 봤다. 판을 유리하게 끌고 가자는 것이지 걷어찰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거래(딜)의 달인' 트럼프 대통령은 성공할 가망이 없는 딜(거래)에 매달릴 사람이 아니었다. 트럼프 역시 세기의 핵 담판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미·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합의를 이루면 미국과 동북아를 핵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구한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다른 미국 대통령들과도 철저하게 차별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방향을 틀었다. 최근 북한 움직임으로 보아 이 담판은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본 것이다.


미·북 정상회담의 이상 징후는 지난 16일 북한의 느닷없는 남북 고위급 회담 연기에서 시작됐다. 그전까지만 해도 트럼프-김정은 담판에 비판적인 워싱턴 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정상회담이 의외로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가 높아지던 추세였다. 하지만 북한이 돌연 남북 고위급 회담을 연기하자, "그래, 이게 원래 북한이지" 하는 실망감이 터져 나왔다.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의 대북 비난 발언과 맥스선더 훈련을 문제 삼고,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현장에 한국 기자 초청을 지연시키는 등 북한이 보여준 일련의 움직임은 그동안 너무 자주 봐온 북한의 본 모습이었다. 일부 전문가는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 북한이 본색을 드러낸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했다. 그대로 회담으로 갔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올 1월 신년사 이후 평창 동계 올림픽으로 이어지는 김정은의 유화 공세에 워싱턴에서도 '김정은은 어쩌면 선대 북한 지도자들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일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이 고위급 회담을 취소하며 예전 행태로 돌아가자 북한을 보는 시선은 다시 차가워졌다. 정상회담이 불발, 지연될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설사 정상회담에서 비핵화에 합의한다 해도 후속 협상이 쉽지 않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란 지적이 나왔다.

미·북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이뤄진다면 북핵 해결의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24일 미·북 회담을 전격 취소했다. 올 1월 김정은의 신년사에서 시작된 유화 국면은 5개월 만에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이 상황이 벼랑 끝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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