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 기자 1인당 1000만원 '비자 장사'… 南취재 거부는 계속]

- 한 달도 안 돼 '판문점 선언' 흔들기
北적십자 "탈북 女종업원 보내라" 송환 문제와 이산 상봉 연계할 듯
韓美훈련 이해한다더니 중단 요구

- 美北회담 판은 안 깬다는 메시지
국제 기자단이 풍계리로 이동할 원산~길주 철로 보수, 열차 시험
외무성 부상 싱가포르 사전답사설
 

북한이 기존의 '약속'들을 줄줄이 뒤집으며 대남 압박성 조치들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오는 23~25일로 예고한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위한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미를 향해 비핵화 허들을 낮출 것을 요구하면서도 판은 깨지 않고 미·북 회담 준비를 계속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은 19일 2016년 중국 내 북한 식당에서 탈출해 귀순한 종업원들과 관련해 "우리 여성 공민들을 지체 없이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써 북·남 관계 개선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회 대변인은 이날 "남조선 당국의 차후 움직임을 심중히 지켜볼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북한은 이 사건 발생 직후부터 송환을 요구했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 요구를 공식화한 것은 처음이다.
 
미국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가 지난 15일 위성사진으로 포착한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모습.
미국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가 지난 15일 위성사진으로 포착한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모습. /38노스
북 적십자회는 "(여종업원) 집단 유인·납치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 판문점 선언에 반영된 북·남 사이의 인도주의적 문제 해결 전망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며 판문점 선언에서 아무 조건 없이 합의한 이산 상봉을 종업원 북송과 사실상 연계했다. 탈북자 송환이 안 되면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도 무산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지난 18일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행사 취재를 위한 우리 방북 기자단의 명단 접수를 거부한 이후 이날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4·27 정상회담 때 핵실험장을 5월 중 폐쇄하고 한·미 전문가와 언론인들을 북한으로 초청하겠다고 약속했었다.

북한은 지난 16일 한·미 연합 맥스선더 훈련과 태영호 전 주영(駐英) 북한 공사의 국회 강연을 트집 잡아 남북 고위급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김정은은 지난 3월 우리 대북 특사단 접견 당시 한·미 연합 훈련에 대해 "이해한다"고 한 바 있다.

북한은 남북 고위급 회담을 취소한 지난 16일 '조(북)·미 수뇌회담 재고려'도 언급했다. 다음 달 12일로 예정된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의 무산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지만 아직 그와 관련된 징후는 없다. 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행사 취재를 위한 우리 기자단의 명단 접수를 거부하면서도 행사 준비는 계속하고 있다. 18일(현지 시각)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는 지난 15일 촬영된 풍계리 위성사진을 공개하면서 "서쪽 갱도 인근 언덕에 보이는 4단짜리 목재 더미가 확연히 높아졌다"며 "핵실험장 남·북·서쪽 갱도 폭파를 관찰하기 위한 전망대 설치용으로 보인다"고 했다.

북한은 국제 기자단이 특별 열차로 이동할 원산~길주 간 철로를 보수하고, 열차 시험 운행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행사에 초청한 외신들을 상대로 기자 1인당 약 1000만원의 비자(사증) 발급 비용을 요구, 외신 기자단 사이에선 "북한이 비자 장사에 나섰다"는 지적이 나왔다. 북한이 미국 CNN과 ABC 등 외신에 대해 "핵실험장 취재를 원할 경우 22일 오전 11시까지 베이징에 있는 주중 북한대사관으로 집결하라"고 공지하며 비자 발급비로 1인당 1만달러(약 1080만원)를 책정했다는 것이다. 베이징~원산 간 고려항공 왕복 이용료 등을 포함하면 1인당 2000만원을 넘길 것으로 추산됐다. 북한은 외신 취재진에게 핵실험장 외에 원산관광특구도 취재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미·북 정상회담이 열릴 싱가포르를 사전 답사하려 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조선중앙통신은 "외무성 부상 최희철을 단장으로 하는 외무성 대표단 일부가 동남아시아 나라를 방문하기 위하여 19일 평양을 출발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연일 '남북 고위급 회담 취소(16일)→풍계리 폭파 남측 취재 거부(18일)→탈북 종업원 북송 요구(19일)'의 순서로 대남(對南)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미국과의 정상회담 의제 조율에 어려움을 겪자, '비핵화 허들을 낮추도록 미국을 설득하라'며 '남한 팔 비틀기'에 나선 모양새다. 최근 두 차례 북·중 정상회담으로 중국의 후원을 확보한 북한이 남북 관계 개선의 속도 조절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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