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문화부장
▲ 김지수 문화부장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판문점에서 랑데부를 하던 날, 전국의 평양 냉면집은 몰려드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쳤다.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가져왔으니 맛있게 드시라'는 김 위원장의 재담이 군침을 자극했을 터.

나도 을지로3가역 공구 상가 골목에 있는 을지면옥을 찾아가 기다림 끝에 냉면 한 그릇을 먹었다. 메밀 함량 7:3 쫄깃하고 묵직한 면으로 배를 채우고 육수와 동치미가 배합된 맑은 국물을 들이키니, 고요한 절간에서 풍경 소리 퍼지듯 ‘슴슴하고 상쾌한' 파동이 육체를 적셨다. 묵은 찌꺼기가 씻겨나가듯 뒷골까지 개운해졌다. 아! 이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맛이라니!

평양냉면은 이북식으로 '국수'라고 부른다. 평양 사람들은 국수를 좋아해 메밀이 제철인 겨울이면 집집이 분틀(면 뽑는 도구)을 두고 국수를 말아먹었다고, 실향민들은 전한다. 서울에선 꿩고기 육수에 쇠로 된 분틀에서 바로 반죽해 뽑은 메밀면을 냉면 배달꾼인 ‘중머리’들이 배달했다.

이젠 의정부 평양면옥이나 을지면옥, 필동면옥 등 실향민과 그 자녀가 세운 ‘이북식 국숫집’엔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노인도 청년도 구별 없이 모여든다. 그 진지한 미식행위를 보자면 마치 우리 몸속에 물보다 진한 육수의 피가 흐르는 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일까. 냉면 한 그릇 싹 비우고 나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세상도 ‘일없이' 다 잘 풀릴 거라는 착각이 드는 건.



을지면옥의 냉면. 평양에서 하듯이 고운 고춧가루를 뿌리고 고깃점과 다진 대파를 올려낸다.
▲ 을지면옥의 냉면. 평양에서 하듯이 고운 고춧가루를 뿌리고 고깃점과 다진 대파를 올려낸다.
한입에 모아 단숨에 빨아들이는 이 단순한 면식(麵食) 행위엔 실제로 갈등을 밀어내는 신비한 힘이 있다. ‘세상 뭐 까칠하게 살 거 있나’ 식의 투항의 미학이랄까. 후루룩 국수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입안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듯 잘 모르는 사람과도 수다를 떨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강철비’에는 서로를 불신하던 남한의 외교안보수석 곽도원과 북한의 최정예요원 정우성이 임진각 근처 휴게소에서 국수를 나눠 먹으며 경계를 푸는 장면이 나온다. 부상당한 ‘북한 1호’가 남한으로 내려온다는 설정을 담은 이 영화는 핵전쟁 위기 상황을 시뮬레이션해서 관객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남북한 요원이 함께 수갑을 차고 판문점 부근 휴게소에서 게걸스럽게 잔치 국수를 먹던 모습은 왜 그리도 정답게 느껴지던지.

미국의 한 군사 전문가는 말했다.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사적으로 실패한 원인 중 하나는 이탈리아 군인들의 파스타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군인들은 파스타가 담긴 접시, 음악, 아름다운 삶에만 관심이 있었다”라고. 군인들은 총을 내려 놓고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국수 먹는 장면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국수’라는 발음엔 축제와 소란과 위로와 친밀함이 다 담겨 있다. 새롭게 가족이 더해지는 합가의 설렘과 괜스레 억울해지는 분가의 이별이 공존하는 결혼식에 순하고 맑은 잔치국수가 없다면 얼마나 서운할까. 국수 가락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연줄’이 된다. 졸업식이나 입학식이 끝나고 먹던 유년의 자장면 한 그릇은 또 얼마나 천진한 성장의 보상이었나.

다양한 인종들이 공항의 높은 테이블에 앉아 동시에 후루룩거리며 국수를 먹고 있는 모습도 감동적이다. 퐁듀나 햄버거 푸아그라나 스테이크가 아니라 달그락 후루룩 짭짭 꿀꺽 소리를 내며 국수를 먹고 있을 땐, 우리 모두 입으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같다. 국수 가락 위에서 우리의 삶은 단순한 1행시다.

영화 ‘우동’에서는 미국에서 개그맨이 되려다 실패한 아들의 꿈에 나타난 아버지가 이야기한다. "네가 미국에서 웃기려는 게 먹히지도 않았잖아. 사람을 웃기는 건 간단해. 맛있는 우동을 먹이면 한 방이야. 맛있는 걸 먹으면 다들 웃잖니."

몇 달 전만 해도 전 세계 여론은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속에도 태평한 한국인을 신기해하더니, 이젠 도보 다리에서 무성 영화를 찍는 남북한 정상과 ‘왁자하게 웃으며 평양냉면을 먹는 한국인'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외신이 앞다퉈 ‘국수 외교’를 선전하니, 한국 대표 음식이 ‘초보자용' 비빔밥과 불고기에서 ‘상급자용' 평양 냉면으로 바뀔 지도 모를 일이다.

전 세계에서 이토록 ‘밍밍한’ 국수를 먹고 열반에 드는 표정을 짓는 사람은 한국인밖에 없을 것이다. 육수의 피, 뭐 그런 게 정말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친김에 오늘 점심도 달고 시원한 평양냉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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