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폐기'의 주인공이 트럼프가 될 줄은 몰랐다
특이한 과시 욕구 누르고 냉철하게 북핵 폐기 이뤄
중재한 문 대통령과 함께 노벨상 받는 모습 보고 싶다
 

양상훈 주필
양상훈 주필

트럼프·김정은이 만나기도 전에 벌써 미국서 트럼프 노벨 평화상 얘기가 나온다.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벨상 받으시라"고 했다. 수많은 사람의 안위가 걸린 협상을 앞두고 미리 상(賞) 얘기를 하는 것이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 같아 찜찜하기도 하고, 뭔가 물밑 협상이 잘되니 이런 얘기도 나오나 싶기도 하다. 북핵을 없애는 공로를 따지자면 트럼프가 1순위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트럼프의 경제적 대북 봉쇄와 군사적 압박을 섞은 최대 압박 작전이 아니었으면 김정은이 이렇게 굽히고 나올 이유가 없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정말로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그런데 솔직히 트럼프가 이런 상황을 만들어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선 민주당의 힐러리가 당선되기를 바랐다. 미국에서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 한국의 운신이 좀 더 편했다. 미국 공화당 주자들의 TV 토론을 보고는 힐러리의 당선을 바라는 마음은 더 굳어졌다. 한국 대선 TV 토론보다 두 배는 더 저질이었던 그 TV 토론에서 트럼프는 무식하고 교양 없는 '백인 건달'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뒤에 벌인 일, 한 말은 그를 혐오하게 만들었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운다며 그 비용을 멕시코에 내라고 했다. 강도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더니 사드 비용을 한국이 내라고 했다. 육두문자가 절로 나왔다. 한국이 대미(對美) 흑자를 안 줄이면 주한 미군을 철수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를 "안정된 천재"라고 공표했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된 날 멍하니 '유령'처럼 보였다고 한다. 자신이 당선될 줄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아내는 맘 편하게 외식 못 하게 됐다고 울고 부부는 종일 싸웠다고 한다. 이런 트럼프가 내뱉는 북핵 관련 언급들도 신뢰하기 힘들었다. 외교·안보 문외한인 사람이 '화염과 분노' 운운하는 자체가 미덥지 않았다. 순전히 미국 내 정치적 곤경 탈출을 위해 평소처럼 침대에서 베개 깔고 엎드려 트위터로 '군사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 놓고 보니 바로 이 무지·무모함과 불확실성이 김정은에겐 엄청난 압박이 된 모양이다. 클린턴, 부시, 오바마의 북한·중국 다루기는 정석(定石)을 벗어난 적이 없다. 북과 중국은 정상 국가가 아니다. 한 집단이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지배층들의 임기는 무제한이다. 이들의 눈으로 볼 때 임기가 있고 정권이 바뀌는 나라의 대통령은 왔다 가는 뜨내기들일 뿐이다. 이 뜨내기들은 학교에서 공부 잘한 모범생들인 경우가 많다. 모범생들이 정석으로 하는 외교 정책은 북·중과 같은 비정상 국가들엔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모범생들과는 종(種)이 다른 사람이 미국 대통령으로 등장했다. 북한과 중국 입장에선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는 심각한 불안감을 가졌을 것이다.

김정은이 비핵화 입장을 밝혔다고 했을 때 많은 분이 '이번엔 진짜일 것 같으냐'고 물어왔다. 김정은은 말할 것도 없고 트럼프도 믿기 힘들었다. "김정은이 핵을 버리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미국과 한국 대부분 전문가들의 합리적 분석을 간단히 뒤엎었다. 이 기적을 만든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트럼프라니 세상 일은 정말 알 수 없는가 보다. 사람에 대한 평가도 쉽게 할 게 아니란 사실을 새삼 절감한다.

하지만 아직도 불안한 것은 트럼프는 여전히 '트럼프'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지만 트럼프는 너무 지나쳐 거의 병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칭찬 강박증'은 그의 무서운 '공적(功績) 독점욕'과 동전의 앞뒷면이다. 트럼프의 이 특이한 성격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사람이 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과 통화한 트럼프는 "문 대통령이 이게 다 내 덕이라고 했다"는 자랑을 빼놓지 않는다. 김정은도 한국 정부를 통해 트럼프 다루는 법을 잘 알게 됐을 것이다. 미·북 회담장에서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 각하는 세계 역사를 바꾼 위인으로 기록되실 것입니다"는 말로 무엇을 얻어낼지 모른다. 그게 한반도에 득(得)일지 독(毒)일지 알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지나고 북핵 폐기에 실제 성공하면 문재인·트럼프 두 사람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아야 한다. 상 때문에 북핵을 폐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럴 때 주라고 만든 상이다. 단 2018년 올해가 아니고 북핵 폐기가 완료된 때에 받았으면 한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뒤에도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은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했었다. 북은 그 시각에도 핵폭탄을 만들고 있었다. 그 남북 정상회담 뒤에 남은 것은 노벨 평화상 1개와 북한 핵폭탄 수십 발이다. 두 번째 노벨상은 달라야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02/20180502031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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