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대북 전단 3억 장 날린… 이민복 대북풍선단장]

정상회담을 TV로 온종일 생중계하지 않았다면
온갖 감성적인 이벤트로 연출하지 않았다면
선언문 내용을 활자로 접했으면… 마냥 들뜰 수 없어
부풀려진 기대의 거품 빼고 객관적으로 현실 보기를
 

"북한으로 날려 보내는 전단은 북한 주민에게 바깥 세계를 알려주는 유일한 언론매체다. 아무리 중대사가 있다 해도 이런 언론 활동을 막을 수 있나. 어떻게 언론이 정치적 흥정이나 타협의 대상이 될 수가 있나."

이민복(61)씨는 자칭 '대북풍선단장'이다. 그는 2003년부터 북한으로 풍선을 날려 왔다. 대형 풍선 한 개에 대북 전단 3만 장을 매달 수 있다. 지금껏 북쪽으로 날려 보낸 전단 숫자는 3억 장쯤 된다.

그는 북한에서 '쌀은 공산주의'라는 김일성의 말을 듣고는 남포농업대학에 들어갔다. 그 뒤 북한농업과학원의 전문연구원이 돼 쌀 증산 연구를 맡았다.
 
이민복씨는 “2000년 정상회담 때는 김정일이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인기가 높았다”고 말했다.
이민복씨는 “2000년 정상회담 때는 김정일이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인기가 높았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벼 종자(種子)가 잘못된 게 아니라 경영이 문제라는 걸 알았다. 중국식 개인농(個人農)을 하면 수확이 두 배 더 올라간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자본주의 반동으로 몰릴 뻔했다. 내가 젊고 순수하며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걸로 면책됐다. 대신 내게 입을 다물라고 했다. 그때부터 내 고민이 시작됐고 결국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탈북자로는 처음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의 도움을 받아 1995년 서울에 왔다. 농촌경제연구원에서 그에게 북한농업 연구 담당을 제의했지만 그는 결국 '대북풍선단장'이 됐다.

"내가 북한에서 갈등하고 있던 시기인 1990년 여름 남한 '삐라'(전단)를 본 적 있었다. 그 삐라를 통해 '6·25가 남침(南侵)'임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당시 그 삐라의 내용은 북한 주민의 정서나 북한식 언어 구사와는 맞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 국방부를 찾아가 '북한 주민을 설득하려면 북한식으로 삐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으나 안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내가 직접 만들고 날리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고무풍선에 전단을 한 장씩 매달아 보냈다. 기압차에 의해 30분도 못 가 풍선은 터졌다. 그는 시행착오를 거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농업용 비닐로 11m 길이의 풍선을 제작했다. 전단도 종이보다 3배 가볍고 물에 젖어도 괜찮은 비닐로 바꾸었다. 선풍기 타이머를 부착해 목표 지점에서 풍선을 터뜨리는 기술도 개발했다.

교계와 일반 시민들이 후원금을 보내준다. 이들이 원하는 대로 달러·북한 돈·약·라디오 등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전단에는 꼭 후원자의 이름을 적고, 풍선 날리는 장면을 찍어 후원자에게 이메일로 보낸다. 전단 3만 장을 매단 풍선 하나를 날리는 비용은 10만원이다. 전단 제작비, 풍선에 집어넣는 수소가스값, 비닐 풍선 2500원, 인건비 1만8000원이 포함된 것이다.

"처음에는 풍선 날리는 일을 무상봉사로 했다. 이게 진정 북한 동포를 돕는 일이고 내가 좋아서 했기 때문이다. 후원자들이 내 생계를 걱정해 인건비(1만8천원)를 가지라고 했다. 술·담배를 안 하고 남이 입던 옷과 가구들을 감사히 받아 쓰며 연탄과 화목을 때니까 한 달 생활비가 70만원밖에 안 든다."

나는 2011년 봄 경기도 포천에 있는 그의 거주지를 찾아간 적 있었다. 그때는 컨테이너 한 칸에 살고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가보니 컨테이너는 2층에다 살림이 늘어나 있었다. 선교사 소개로 중국 여성과 재혼했고 세 명의 자녀와 함께 산다고 했다. 근방 공터에는 풍선에 수소를 집어넣는 탱크로리 장비가 놓여 있었다. 3시간이면 풍선 100개까지 날릴 수 있다고 했다.

한쪽에서 서성거리던 사복 경찰이 다가와 '혹시 명함을 받을 수 있느냐'며 말을 건넸다. 그에게는 경찰 두 명씩 3교대로 24시간 신변 보호가 따라붙는다.

"내가 이뻐서 이분들이 있는 게 아니라, 2011년 대북 전단을 날려온 탈북자 박상학씨를 독침으로 암살하려다 적발된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북한 정찰총국의 지령을 받은 한 탈북자였다. 범인의 입에서 암살 대상자로 나와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이름도 나왔다. 그때부터 신변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어떨 때는 내가 풍선 날리는 걸 막아서 이들과 다투곤 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그가 대북 풍선을 날린 지 15년이 됐다. 노무현 정권 시절 남북 군사실무회담에 나온 북측 대표단이 대북 전단 수백 장을 모은 상자를 회담장 책상에 던지기도 했다. 경찰을 피해 숨바꼭질이 벌어지고, 전화 추적과 장비 압수도 있었다. 자격증 없이 풍선에 수소를 집어넣는 것은 불법이라며 '고압가스법'으로 막으려고 했다. 그는 불법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그런 자격증을 모두 땄다.
 
2018 남북정상회담
/한국공동사진기자단

―북한 정권은 전단을 날리는 임진각을 포격하겠다고 위협한 적 있다. 지역 주민이 위협받고 예기치 않은 남북 간 충돌이 벌어진다면 대북 전단 살포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바깥세상의 정보를 유입하는 대북 전단에 북한 정권은 가장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고 이벤트처럼 떠들썩하게 날려서는 안 된다. 나는 지금까지 조용히 해 왔다. 풍선은 소리가 안 나고, 열 추적이나 레이더 추적에도 안 걸린다. 이쪽에서 떠들지만 않으면 북한 정권이 알 수가 없다."

판문점 정상회담이 열리기 보름 전인 4월 10일, 그는 풍향이 맞아 경기도 연천으로 전단을 날리러 갔다. 하지만 길목에서 경찰 20여 명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철원의 백마고지로 차를 돌렸지만 그쪽에서도 역시 막혔다.

"지난 22일에도 풍향이 맞았지만, 신변 보호 경찰이 '정세가 이러니까 상부에서 가지 말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출발해 봐야 기름값만 날리고 허탕 칠 게 뻔했다. 경찰이 막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막으면 나는 투쟁할 것이다."

이제 그의 활동은 사실상 막혔다. '판문점 선언'의 1조 2항에는 대북 전단 살포 중지를 못 박아놓았다. 갑자기 찾아온 남북 평화 무드에서 대북 전단을 날리겠다는 것은 마치 여론을 반역하는 행위처럼 비친다.

"우리 정부는 북한 정권과 어떻게 해보겠다는 정책만 있다. 북한 주민을 위한 정책은 없다. 북한 주민을 위한 언론ㆍ인권에 대한 개념이 없다. 외부에서 정보를 유입시켜 북한 주민들의 의식 변화를 이뤄내려는 노력도 전혀 없었다."

―판문점에서 보여준 김정은의 스타일은 장차 북한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지 않나?

"미국 트럼프 정권의 압박을 받고 김정은은 더는 물러날 데가 없어 나왔는데 우리 정부가 너무 포장했다. 정상회담으로 이미 평화가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고 환상을 갖겠지만, 북한 내부는 변한 게 없다. 김정은의 파격이 어떻다 하지만, 북한 정권의 속성은 바뀌지 않는다."

―박지원 의원은 김정은에 대해 '영특하다'는 표현까지 썼다. 우리 국민 상당수는 이제 그를 '귀여운 뚱뚱이' '북한의 젊은 지도자'로 생각하게 됐다. 그가 고모부 장성택과 형 김정남을 살해한 독재자라는 사실은 지워졌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났을 때도 우리 언론에서는 '북한이 드디어 개혁·개방으로 나왔다'고 보도했다. 김정일은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인기가 높았다. 지금 또 그런 착시(錯視)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김정은이 자신을 '정상(正常) 국가'의 지도자로 선보이려는 의지는 읽을 수 있지 않나?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북한 체제 속성은 쉽게 바뀔 수 없다. 조금이라도 바뀌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바뀌는 것밖에 없다. 이번 정상회담은 당초 비핵화 문제를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비핵화는 선언문의 머리가 아니라, 마지못한 장식용처럼 제일 끝 조항에 들어가 있다. 그것도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확인했다. 남북이 이를 위해 앞으로 각기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하였다'며 애매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번 정상회담이 한반도의 전쟁 위기를 촉발시킨 북핵 문제를 모호하게 희석해버린 측면이 없지 않다.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라 '완전한 비핵화'로 명시됐고, '남북은 각자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구절은 우리 정부에 미군의 핵우산을 거둬들이고 핵무기를 탑재한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를 막아달라는 것이다. 이는 2005년 6자 회담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보다 훨씬 후퇴했다. 당시에는 그래도 '북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 포기를 공약했다'고 명시됐다. 물론 지켜지지 않았지만.

"이번 회담 성사를 위해 북한이 원하는 대로 해줬다고 본다. 북핵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엄숙히 천명하였다'는 선언은 현실성이 없다."

―이는 향후 미·북 회담이 결렬됐을 때도 미군의 군사적 옵션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자칫 한·미 공조를 허물어뜨릴 수 있다. 판문점 선언문에는 고의든 실수든 이런 독소조항이 눈에 띈다.

"선언문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빼면 거의 전부가 북한이 그전부터 주장해오던 것들이다. 북한의 비핵화는 모호한데, 대북확성기나 대북 전단 살포 중단을 5월 1일로 날짜를 박았다."

―이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는 다음 날이 5월 1일인데, 어떻게 할 건가?.

"정부 간에 대북 전단 중단을 합의한 것이지, 민간이 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언론을 중지하라는 게 말이 맞느냐. 라디오와 인터넷까지 막는 북한에서 대북 전단은 주 민을 위한 언론이다. 북한이 개혁·개방되기 전까지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

판문점 정상회담을 TV로 온종일 생중계하지 않았다면, 감성적인 이벤트로 연출하지 않았다면, 그 선언문 내용을 활자로만 접했으면, 우리 국민은 이렇게 들뜬 상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풀려진 낙관과 기대의 거품을 빼고 좀 더 객관적으로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29/2018042901938.html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