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 全方位 제재로 북한을 협상장으로 이끌어냈지만 강한 自我 탓 "쉬운 상대" 평가도
그의 선택에 우리 命運도 달려
 

이철민 선임기자
이철민 선임기자

지난 27일 남북한 정상회담 종료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찬(自讚)의 말을 쏟아냈다. 그는 지난 25년간 대북(對北) 협상에서 실패하고서도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했던 이들을 보며 "큰 짜릿함(a big, big kick)을 느낀다"고 했다. 또 이 모든 일이 가능해진 것이 "이제 미국에 새 지도자가 있기 때문"이라며 "이것(북한 비핵화)은 미국을 넘어 세계를 위해 내가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일"이라고 했다.

4·27 판문점 선언에서 그가 흥분한 구절은 뒷부분에 명시된, '완전한 비핵화' '핵 없는 한반도'라는 남북한 공동의 목표일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비핵화 선언(1992년), 경제협력 강화를 담은 남북 정상 공동선언문(2000년), 한반도 핵 문제 해결 및 종전 선언을 위한 노력을 담은 남북 정상 합의서(2007년) 등, 비슷한 길을 가본 우리로선 북한 핵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CVID)'가 이뤄질 때까지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난 20일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의 폐쇄 및 핵실험·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 중지를 발표했을 때, 트럼프는 "아직 (미국이) 아무것도 양보한 것이 없는데, 북한은 비핵화에 동의했다"고 트윗했다. 북한의 당시 조치가 CVID를 골자로 한 비핵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협상의 대가(大家)'라는 그가 왜 때 이른 반응을 드러내는 것일까.

트럼프의 심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가 "성경 다음으로 심오하다"고 자랑하는 저서 '협상의 기술(Art of Deal)'과 '크게 생각하라(Think Big)'를 들춰봤다.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협상은 늘 상대에 대해 지렛대(leverage)를 쥐고 해야 하며, 나에 대한 기존 생각을 확신시켜 줄 때 성공한다"와 "적(敵)이 나중에 화해 제스처를 취해도 철저히 복수해 결코 남들처럼 나를 대하지 못하게 한다"였다.

이런 발상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화염과 분노, 세계가 여태 못 본 화력"(작년 8월), "더 크고 강력한 핵 버튼"(올해 초)을 경고하며 전방위 대북 제재를 주도해 북한을 협상장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흥미롭게도 이미 각국 정부는 자아(ego)가 유난히 강한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歡心)을 사는 법을 깨쳐가고 있으며 일부 국가는 트럼프 공략에 효과를 보고 있다. 작년 7월 환율조작국이고 대북 압박이 소극적이라고 몰아붙였던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처음 마주 앉았던 트럼프가 "깨달았다"고 토로한 다음 발언이 이를 방증한다.

"시 주석으로부터 중국과 남북한의 수천 년 역사와 전쟁들을 10분 듣고 나니, 한국이 중국의 일부였다" "중국은 환율조작국이 아니다"….

회담 전에는 과격한 '말 폭탄'을 쏟아내던 트럼프가 1시간여 만남 후에는 생각을 180도 바꾼 것이다. 미국의 한 매체는 이와 관련, "트럼프는 정상 간 회담에서 '쉬운 상대(pushover)'"라고 빗댔다.

미국 내에선 벌써부터 북한 비핵화의 엔드게임(end game·종착점)을 놓고 북한 핵 제거 없이 서로 체면 세우고 전쟁도 없는 '핵 동결'이니 '강제 사찰·검증은 없는 길고 긴 협상' 등을 예고한다.

트럼프는 자신의 저서에서 "패배를 인정하면 앞으로도 패배하게 된다" "사람들이 뭔가 엄청나고 위대하고 가장 멋진 것을 기대할 때에 그 환상을 맞춰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건 악의(惡意) 없는 과장(truthful hyperbole) "이라고 했다.

한 달 뒤, 김정은과 회담장에서 마주 앉을 트럼프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강력한 우위와 철저한 보복을 중심으로 강하고 거친 협상 스타일을 그대로 펼 건가? 아니면 미국민이 그에게 품고 있는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회담의 형식적 성공이라는 달콤한 환상에 빠질 건가? 그의 선택에 태평양 건너편에 있는 대한민국 5000만명의 운명이 달라질 판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29/20180429019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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