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총선·헌법 제정·정부 수립 '대한민국 70년'은 찾기 힘들어
南北 체제 경쟁서 앞서고도 자부심 없이 회담에 나설 건가
 

김태익 논설위원
김태익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은 사흘 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러 판문점에 간다. 문 대통령이 길을 나서는 광화문광장의 정부 종합청사에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70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사건 중에는 기념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다. 최초의 국회의원 총선거, 헌법 제정·공포, 초대 대통령 선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그런데 칠순(七旬) 대접을 제대로 받는 것은 4·3뿐이다. 지난해 정부가 내놓은 올해 예산안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 관련 항목은 '0원'이었다. 올해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에는 국비 75억원을 포함해 168억4400만원이 들어간다. 4·3에서의 양민 희생은 다시는 있어선 안 될 불행한 역사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 출범을 저지하려는 남로당의 무장 반란이라는 사건의 원인까지 다시 평가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 1월 1일 신년사에서 "올해 우리는 영광스러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일흔 돌을 맞이하게 된다"며 "자기 국가의 창건 일흔 돌을 성대히 기념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의의 깊은 일"이라고 했다.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있다"며 엄포를 놓던 그 연설이다. 김정은은 자기네 공화국을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최대의 애국 유산"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공화국 창건을 "주체 조선의 건국(建國)"이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월 2일 새해 첫 공식 일정으로 현충원을 참배하고 방명록에 이렇게 썼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건국 백년을 준비하겠습니다'. 정상회담은 기(氣)와 의지의 대결이다. 이 대결을 뒷받침하는 힘은 자기 국가·체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에서 나온다.

김정은은 공화국 창건 70주년을 '대경사(大慶事)'라며 자축하는데 우리 대통령에게는 '대한민국 70년'에 대한 경의(敬意)가 없는 것 같다. 문 대통령은 작년 대선 기간 중에는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임정기념관 터를 찾아 "아직도 대한민국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만들지 못했다"고 했다.

북한의 '공화국' 창건 과정은 김정은이 얘기하는 '영광'과 애초 거리가 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 자체가 소련 공산당 작품이었다. 헌법도 소련이 동구권에 위성국가들 세울 때 전례에 따라 자구(字句) 하나하나까지 지시해 만든 것이었다. 김일성은 초대 내각 명단을 보내 소련 공산당의 심사를 받았다.

지난 70년은 남북한 체제 경쟁의 역사였다. 남쪽 체제를 견인해 온 것이 올해 7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 정부인데, 문 대통령과 현 집권 세력은 이걸 안 보고 100년 전 상해 임시정부로 뒷걸음질하고 있다. 해방 당시 북한의 공업 생산력은 남한에 비해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한반도 전력의 92%, 철광석의 98%, 금속 산업의 90%, 화학 산업의 82%가 북에 있었다. 이런 열세(劣勢)와 악조건 속에서 북의 공화국보다 더 번영하고, 더 민주적이고, 더 활기찬 나라로 성장한 게 대한민국의 지난 70년이었다. 그런데 공화국 창건 70년은 있고 대한민국 수립 70년은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정부는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표어를 '평화, 새로운 시작'이라고 내걸었다. 평화는 중요하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더욱 번성할 수 있는 평화를 만드는 것은 더 중요하다. 지금 같은 때일수록 체제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하고 우리가 이룬 것들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게 필요하다. 대통령부터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 생각일랑 지우고 회담장에 가시기를 부탁드린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23/20180423027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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