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섭 국제부 기자
정지섭 국제부 기자

"이스라엘인을 포함해 누구나 자기 나라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다." 아랍 세계의 맏형을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실세(實勢)인 빈살만 왕세자가 최근 미국의 한 시사주간지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불법 점령하고 있다"며 70여년간 똘똘 뭉쳐온 아랍 진영의 단일 대오(隊伍)가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발언으로 팔레스타인이 받을 충격은 엄청날 것이다.

25년 전인 1993년 오슬로평화협정이 체결됐을 때만 해도 이런 모습은 상상조차 힘들었다. '영토와 평화의 맞교환'을 통한 '두 국가 공존'이라는 해법이 도출되면서, 평화 정착과 팔레스타인 독립국 창설이 눈앞에 온 듯했다. 협정 주역들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팔 갈등은 격화됐고, 급부상한 이란에 맞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연대하는 구도가 되면서 약자(弱者) 팔레스타인은 국가 창설은커녕 소멸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됐다. '팔레스타인 땅과 사람들을 이스라엘·이집트·요르단이 분할·관리하자'는 대안(代案)까지 거론될 정도다.

45년 전 베트남전쟁 때 체결된 '파리평화협정'도 이름만 그럴듯한 '평화협정'의 민낯을 보여준다. 베트남전의 공식 종료는 남베트남이 패망한 1975년이지만, 미국에서는 올해를 실질적인 종전 50주년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베트공의 총공세와 국내 반전 운동에 직면한 미국이 철군 방침을 굳히고 북베트남과 평화회담을 시작한 게 50년 전인 1968년인 탓이다.

주목되는 것은 1973년 1월 평화협정 체결로 미국이 철군한 뒤 2년여 만에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의 침공으로 지도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 명목상 평화협정이었지만, 미국엔 '철군의 구실', 북베트남엔 '적화통일의 기회', 남베트남엔 '망국의 시발탄'이 된 것이다.

이처럼 평화협정의 결말이 말 그대로 평화를 정착시킨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 체결된 평화협정의 50%는 5년 안에 폐기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요즘 한반도 평화 정착 방안의 하나로 '평화협정'이 부쩍 거론된다. 북한이 비핵화에 합의하면, 평화협정을 맺어 미군이 한반도에서 완전 철수한다는 것이다. 남북한과 미·중 정상 연쇄회담이 이어지면 평화협정이 회의 탁자에 오를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불안하다. 앞서 파 리와 오슬로에서 체결된 평화협정 선례를 보면, 강자(强者)들은 이득(利得)을 챙긴 반면 힘없는 약자(남베트남·팔레스타인)는 패망 또는 소멸 위기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 위협 대상인 한국은 미국의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는 약자다. '평화'라는 말이 주는 장밋빛 전망에 도취해 현실을 오판한다면, 실패한 평화 협정의 새 사례로 한반도가 추가될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04/201804040322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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