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좌파는 '무장 반란' 지우고 '민중 항쟁' '통일 운동'으로 부각
정치적 이용하려는 세력 배제하고 '진상 규명, 명예 회복'으로 復歸를
 

이선민 선임기자
이선민 선임기자
제주 4·3 70주년범국민위원회는 지난 2월부터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국가적 비극이었던 4·3 사건에 대한 관심이 그동안 사건이 일어난 제주도에 국한됐다는 인식에서 이제 온 국민에게 널리 알려서 '4·3의 전국화'를 이루겠다는 것이다. 지난달 30일 서울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개막한 특별전이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라는 주제를 내건 것도 같은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4·3 사건에 대해 제주도 밖에서 합당한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은 희생자 규모가 워낙 엄청나서 충격적인 데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된 첨예한 쟁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도 진압 군경(軍警)과 남로당 무장대에 살해된 희생자 유족들 사이에 갈등이 계속되고 있어 외지인(外地人)이 끼어들기 어려웠다. 수십 년 동안 가슴에 피멍울을 안고 연좌제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아온 희생자 유족들의 아픔에 선뜻 위로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4·3 문제 해결을 위해 2000년 4·3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2003년 4·3 보고서가 나온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4·3 보고서가 일방적으로 작성됐고 내용도 왜곡됐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최근에는 일부 정치인이 제출한 4·3 특별법 개정안을 놓고 대립이 재연되고 있다.

제주 4·3에 관한 논란을 보면서 드는 가장 큰 의문은 명예 회복을 주장하는 쪽이 왜 '남로당의 무장 반란'에서 모든 사태가 비롯됐다는 점을 애써 외면할까 하는 것이다. 남로당이 4·3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만든 문건이 말해주는데도 4·3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인사들은 이를 무시했다.

남로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을 무장 공격했고, 주민들의 5·10 선거 참여를 방해했다. 그들의 종용에 못 이겨 입산한 수많은 양민이 한라산 동굴에 웅크리고 있는데 주도자들은 그들을 버리고 월북해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와 입지를 위해 제주도민을 이용한 것이다.

4·3 사건 당시 3000명 넘게 경찰에 자수시켜 목숨을 구하게 해서 '한국의 쉰들러'라고 불리는 조남수 목사는 1987년 펴낸 '4·3 진상'이란 책에서 "4·3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문제도 없었다. 4·3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이고 그 의도와 목적이 무엇이었던가를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며 "4·3 사건은 이 섬을 공산화하려는 공산주의자에 의한 폭동이었다"고 말했다.

제주 4·3 사건에서 '남로당의 무장 반란'을 지우면 '점령군 미군에 대한 제주도민의 항쟁' '통일 독립을 위해 단선단정(單選單政)을 거부한 운동'으로 성격이 변질된다. 일부 제주도 밖의 좌파 학자나 운동권 인사들은 4·3이 '민중 항쟁' '통일 운동'이었다고 부추긴다.

4·3 위원회 위원으로 보고서에 큰 영향을 미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4·3 사건은 먼 역사적 관점에서는 최초의 통일 시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주도에서는 이들에게 고무된 일부 인사가 '4·3의 정명(正名)'을 주장하지만 이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반미친북(反美親北) 성향의 일부 인사를 제외한 대다수 국민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은 오히려 4·3의 진정한 전국화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제주 4·3이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서 진정한 '대한민국의 역사'가 되려면 4·3 특별법이 내걸었던 '진상 규명과 그 토대 위의 희생자 명예 회복'이라는 원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역사적 자료가 말하는 대로 4·3 사건의 실제 모습을 밝히고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를 그 바탕에서 추모하는 것이 올바른 해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자신들의 정치적·이념적 목적을 위해 제주도를 이용하려는 외부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70년 전 남로당처럼 제주도민보다 자신들의 목표와 입지가 더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하면 언제라도 제주도민을 버릴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03/201804030395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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