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29일 북측과 고위급 회담을 갖고 남북 정상회담을 내달 27일 판문점 남측 구역인 자유의집에서 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회담 의제에 대해선 발표하지 않았다. 청와대는 "의제는 좀 더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상회담이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의제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이전 두 차례 회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에서 열린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비핵화에는 눈을 감고 대북 지원과 교류·협력에만 열중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지원해준 것이 됐다. 이제 북은 핵 보유국을 주장하고 있다. 다른 의제가 있을 수 없다. 북핵 폐기 아닌 다른 의제는 합의해봤자 실현될 수도 없다. 비핵화는 형식적으로 언급하고 또 남북 교류, 대북 지원이나 나열하면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김정은은 시진핑 중국 주석에게 "한·미가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 동시적인 조치를 한다면 비핵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했다. 비핵화한다면서 제재를 이완시키고 실제 비핵화 과정에는 수많은 난관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들려는 수법이다. AP통신의 표현대로 지난 25년간 써먹던 '낡은 포도주를 새 병에 담은 것'일 뿐이다. 이제 여기에 속을 사람은 거의 없다.

이상한 것은 청와대의 태도다. 청와대는 며칠 전까지 북핵 폐기와 북 체제 보장을 한꺼번에 푸는 일괄타결식 해법을 거론하며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버리는 방식"을 공언했다. 그러다 김정은이 이와는 반대인 '단계 조치'를 언급하자 방향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단계적 조치와 일괄 조치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식의 말들이 나오는 것도 그런 조짐 중의 하나다. 조만간 대통령 특보 등 청와대 주변에서부터 '단계 조치가 옳다'는 주장이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

청와대까지 김정은 방식에 동조하고 나오면 북핵 폐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미국은 최단시간 내 핵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폐기하는 리비아식 해법을 추진하고 있지만 북·중만이 아니라 한국까지 과거의 단계 조치를 다시 하자고 나오면 이를 수용하면서 미국을 위협하는 ICBM만 없애려 할 가능성이 있다. 11월 미국에 중간 선거가 있어 이 우려는 결코 기우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는 사실상 비핵화만 다루고 다른 남북 교류 논의는 미·북 정상회담 이후로 넘기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김정은이 진정한 비핵화 의사를 갖고 트럼프와 만나 단기간 내에 북핵 폐기와 북한 체제 보장 및 지원이 합의되면, 그 직후 2차 남북 정상회담을 갖고 현실성 있는 남북 교류를 논의할 수 있다. 불필요한 남남 갈등도 줄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일 야당 대표들과 만나 "(북한) 핵을 용인할 수 없다"며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대북 제재를 완화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 김정은이 몸이 달아 한·미·중으로 달려가는 것은 대북 제재 때문이다. 지금 수준의 제재가 계속되면 올해 말쯤에는 북한 체제에 균열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비핵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대북 제재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제재만 유지되면 김정은에게 핵은 점점 골칫덩이로 바뀐다. 만에 하나 청와대가 김정은식 단계 조치를 따라가면 그것은 대북 제재가 흔들리는 신호탄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이를 적극 활용하면 대북 제재가 허물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때는 비핵화는 또다시 물거품이 되고 북핵은 굳어진다. 더 이상의 악몽이 없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29/20180329034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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