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현 논설위원의 뉴스파일] 중국의 한국기자 폭행 100일

- 그날 베이징에서 무슨 일이…
文대통령 취재하던 기자 2명, 中경호원 10여명에 폭행당해… 안와·코뼈 골절 등 중상

맞은 기자 "그날이 내 생일… 우리 네티즌이 되레 악성댓글…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中은 1명만 구속 '사건 뭉개기'… 기소 않고 "아직 수사중" 말만
우리 정부 "中외교부 유감표명 중국이 사과한 것으로 봐야… 韓·中간에는 다른 현안도 많다"
국가적 굴욕에도 제목소리 못내
 

안용현 논설위원
안용현 논설위원

작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國賓) 방문 행사를 취재하던 한국 기자 2명이 중국 경호원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한 지 23일로 100일이 넘었다. 사건 직후 청와대는 "중국 측이 최선을 다해 이 문제 해결에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고, 문 대통령도 "(중국 측의) 적절한 조치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중국이 한 것은 '폭행 가해자 1명을 구속 수사 중'이라는 통보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외교부 부부장의 말뿐이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배상은커녕 제대로 된 사과도 없는 상황이다. 한국 대통령 공식 수행단이 집단 린치를 당한 전무후무한 사건인데도 중국은 국내 사건처럼 어물쩍 넘어가려는 분위기다.

당시 구둣발에 차인 매일경제 이모 기자는 안와(눈 주위 뼈)와 코뼈가 골절돼 안구가 튀어나오는 중상(重傷)을 입었다. 요리가 취미였던 그는 한때 미각과 후각의 90%를 상실했다. 한국일보 고모 기자는 뒤로 넘어지면서 흉추(등뼈) 미세골절상을 당했다. 두 기자는 최근 현장에 복귀했지만, 부상이 심했던 이 기자는 집단 폭행의 트라우마 때문에 아직도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 쓰러진 채 짓밟히고 차이던 악몽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서울 세종로 커피숍에서 만난 한국일보 고 기자는 지난 100여 일을 떠올리며 "몸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아팠다"고 했다. 중국에서 한국 대통령을 더 잘 찍으려다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것인데, 중국도 아닌 한국 네티즌들이 '연예인 사진 찍으려고 기자가 경호 라인을 넘었다' '기레기가 맞을 짓을 했다'는 등의 악성 댓글을 쏟아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댓글을 보는 가족들이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며 "몸은 회복되겠지만 댓글 린치에 당한 마음의 상처는 쉽게 낫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생일날 집단 린치 당한 한국 기자

고 기자는 "폭행 사건이 일어난 12월 14일이 하필 내 생일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와 매일경제 이 기자는 청와대 '사진 풀(pool) 기자'로 베이징 국가회의중심에서 열린 '한·중 경제무역 파트너십' 행사에 참석한 문 대통령을 취재했다. 풀 기자란 수행 기자단 대표로 대통령 사진을 찍어 모든 언론사에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기자들끼리 취재 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사진 풀 기자는 4명이었다. 고·이 기자는 자리를 옮기는 문 대통령을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더 좋은 앵글(각도)에서 문 대통령을 찍고 싶었다"고 했다. 그 순간 중국 경호원 15명이 두 기자의 앞을 막았다. 대통령 근접 취재가 가능한 비표(秘標)를 보여줬지만 막무가내였다. 고 기자가 항의하자 경호원 한 명이 바로 넥타이를 낚아채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카메라를 들고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혔다. 그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그 사이 중국 경호원들은 이 기자를 복도로 끌고 나갔다. 10여 명이 둘러싸고 주먹질을 했고 이 기자가 쓰러지자 구둣발로 사정없이 안면을 걷어찼다. 청와대 관계자와 다른 기자들이 말렸는데도 발길질은 계속됐다. 불구가 돼도 좋다는 식의 집단 린치였다.

◇중, 가해자 1명만 구속하고 석 달 넘게 '아직 조사 중'

중국 공안(公安)은 14일 밤부터 15일 새벽 두 기자가 입원한 병원에서 폭행 피해자 조사를 했다. 고 기자는 "공안들이 '비표는 패용했느냐' '먼저 행동한 것은 없느냐'는 등 폭행 원인을 우리 측에서 제공한 것 아닌지 묻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했다. 중국 측은 사건 13일이 지난 12월 27일에야 "폭행 가해자인 경호원 리모씨 1명을 고의 상해 혐의로 구속했다"고 우리 측에 통보했다. 중국 의사는 이 기자의 부상 정도를 '중상(생명이 위험한 수준)' 바로 아래인 '경상 1급(후유증이 남는 수준)'으로 진단했다.
 
중국의 한국기자 폭행 사건

그러나 이 조치는 폭행에 가담한 다른 경호원들은 처벌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다른 기자가 사건 현장을 촬영해 중국 측에 넘긴 동영상만 봐도 쓰러진 이 기자 폭행 장면에는 5~6명이 등장한다. 이 중 걷어차는 모습이 분명하게 찍힌 1명만 구속한 것이다. 중국 측은 "폭행을 해도 직접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국내법 때문에 최종 가해자 1명만 구속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한 변호사는 "누구의 폭행으로 다쳤는지는 중국 공안이 얼마든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이 이번 사건을 집단 폭행이 아닌 경호원 1명의 우발적 폭행으로 '꼬리 자르기'를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공안은 가해자를 구속한 지 석 달이 넘었지만 '아직 수사 중'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중국 형법상 구속 피의자는 기소 전 공안에서 최장 8개월 7일, 검찰에서 6개월 15일 등 모두 14개월 22일 동안 조사가 가능하다. 구속 20일 안에 기소해야 하는 한국과는 크게 다르다. 하지만 대다수 폭행범은 2~3개월 안에 기소가 결정된다고 한다. 중국의 외교 소식통은 "중국 측이 최대 정치 행사인 3월 양회(전인대와 정협) 일정 때문에 처리가 늦어진다고 말하고 있지만, 한국 내 관심이 줄어들 때까지 사건을 뭉개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 중국이 이대로 시간을 끌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물 건너갈 공산이 크다.

◇중 외교부 부부장 '유감' 표명에 우리 정부 "사과받은 것"

중국 측 사과도 우리 정부는 "이미 받았다"는 입장이다. 중국 외교부 쿵쉬안유(孔鉉佑) 부부장이 1월 초 방한해 "(문 대통령) 국빈 방중 기간 불상사가 생긴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우리 외교부가 보도자료로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중국이 사과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고 기자는 "피해자 조사 때를 빼고 어떤 중국 사람도 찾아온 적이 없는데 (내가) 무슨 사과를 받았다는 거냐"고 했다. 그러면서 "1월 초 우리 당국자가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유감을 표명했다'고 연락해온 이후 정부로부터 전화 한 통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다른 외교 당국자는 "기자 폭행 사건은 중국 측이 가해자 기소를 하면 사실상 마무리되는 것"이라며 "배상은 피해자 개인이 소송 등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중 간에는 다른 현안도 많다"고 했다.

중국은 처음부터 사과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폭행당한 기자들이 대통령 공식 취재단이고, 청와대 직원들의 만류에도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한국사진기자협회 성명처럼 "대한민국이 폭행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진상 규명·처벌·배상은 물론 피해 기자들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직접 사과까지 받아야 다친 국격(國格)을 조금이나마 회복하는 길이다.


[시진핑은 상석, 우리 특사는 하석에… 계속 이어지는 '한국 홀대']
 
중국의 한국 홀대

최근 중국은 한국을 아래로 보는 듯한 행태를 보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작년 5월과 지난 12일 문 대통령 특사가 시진핑 주석을 만날 때 시 주석은 상석(上席)에, 우리 특사는 하석(下席)에 앉는 자리 배치였다. 반면 작년 10월 베트남과 라오스 특사는 시 주석과 나란히 앉았다. 이에 대해 베이징 외교 소식통은 26일 "중국 측이 '새로 정착되는 관행'이라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한국 특사만 하석에 앉히는 게 중국의 새 관행인가. 중국은 국빈이던 문 대통령에게 열 끼 중 두 끼만 대접하기도 했다. 시 주석과는 한 끼만 먹었다. 반면 북한 김정은은 베이징에서 세 끼 중 두 끼(만찬·오찬)를 시 주석과 같이 했다.

주재우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는 "중화 부흥을 꿈꾸는 중국은 과거 주변국과의 조공(朝貢) 외교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며 "우리가 중국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기자 폭행 사건을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더한 굴욕을 당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사람들은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君子報仇 十年不晩)'는 말을 자주 쓴다. 우리가 기억할 말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28/20180328036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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