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北도, 美도, 南도
한·미 정부의 묘한 접점을 북한은 뱀처럼 파고들고 있다
 

선우정 사회부장
선우정 사회부장

2차대전 말기 북한 광산이 일본의 생명선으로 떠올랐다. 핵무기만이 전세(戰勢) 역전을 위한 수단으로 남았을 때다. 일본은 북한에서 핵무기 원료인 우라늄 235를 얻으려고 했다. 실제로 1944년 6월부터 국근광산에서 우라늄을 함유한 광물을 채굴했다. 흥남 용흥공장에서 원폭 실험에 성공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니호(ニ號) 연구'란 이 극비 프로젝트가 1~2년 전 성공했다면 일제는 망해도 그렇게 참담하게 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북한만큼 제국주의가 남기고 떠난 군사 시설로 이익을 본 집단이 없다. 북한은 일제의 병기제조소에서 총·기관총·박격포를 대량 생산했다. 철·납·니켈·화약 등 무기의 재료는 일제의 제철·중공업·비료·염료공장을 활용했다. 이 무기로 6·25전쟁을 일으켰다. 북한은 일제의 침략 기지를 활용해 민족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이런 집단이 일본이 증명한 북한의 핵개발 잠재력을 무시했을 리 없다.

사람들은 북한이 1990년대 초부터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여긴다. 이런 상식은 그릇된 선입관을 만들었다. 당시는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북한이 위기에 몰린 때다. 이런 시대 배경 탓에 '체제 위기 때문에 핵을 개발했다' 논리가 나왔다. 이 논리를 뒤집으면 '체제가 보장되면 핵을 포기한다'로 귀결된다. 북한 옹호론의 상투적 레퍼토리다. 요즘 북한에 다녀온 한국의 당국자들이 전파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북한이 핵물리학 연구소를 세운 건 1955년이다. 50년대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세계의 공통 관심사였다. 따라서 연구 시점이 수상한 건 아니다. 문제는 목적이 처음부터 평화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1965년 핵무기 개발을 공식 언급했다. 대량의 우라늄 235를 발굴했다고 떠든 것도 그때다.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고폭(高爆) 실험을 북한이 1983년부터 반복했다는 증언이 있다. 그들의 핵 집착은 90년대가 아니라 6·25 직후부터 시작됐다.

북한 옹호론자는 한국 내 미군 핵무기가 북한의 핵개발을 야기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장 시도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거짓이다. 한국이 핵무장을 포기하고 미국이 한국에서 핵을 뺀 뒤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적이 피로하면 공격하고(敵疲我打) 후퇴하면 추격한다(敵退我追)'는 공산당 수법의 전형이다. 이때 북한 옹호론자가 새 논리를 들고나온 게 체제위기론이다. 체제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핵을 개발한다는 주장이다.

거짓이다. 북한은 그 논리로 이미 세상을 속였다. 사회주의 몰락으로 수세에 몰렸을 때 그들이 택한 상대는 지금처럼 한국이었다. 1991년 남북합의서를 만들었다. 이 합의서 제1조가 '체제 보장'이다. 무력 사용 금지도 명시했다. 비핵화 공동선언도 그때 했다. 배신은 순식간이었다. 2년 후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했다. 무력을 안 쓴다던 약속은 서해 도발,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으로 깼다. 한국은 약속을 지켰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에게 '체제 보장' 선언은 유효하다. 동맹인 미국에도 적용된다. 그러니 북한은 '체제 보장' 타령을 반복하지 말고 그냥 핵을 포기하면 된다. 누굴 바보로 아나.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遺訓)'이란 헛소리까지 한다. 이런 소리를 한국 당국자가 대변한다.

북한에 '체제 보장'은 '미군 철수'와 동의어다. 남조선혁명론을 외칠 때도, 연방공화국론을 외칠 때도 조건은 미군 철수였다. 1991년 '체제 보장' 합의를 그들이 쉽게 찢어버린 건 미군 철수 조건이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수백만을 굶겨 죽인 '고난의 행군'을 거쳐 핵을 쟁취했다. 그런 북한이 27년 전 찢어버린 '체제 보장' 합의와 핵을 맞바꿀 리 없다. 초등생도 안다. 북한이 천지개벽 하지 않았다면 미군 철수와 동맹 해체를 반드시 내세울 것이다.

김정은은 왜 지금 핵 카드를 내밀까. 트럼프 미 대통령은 선거 유세 때 "미국이 한국을 지켜주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했다. 주한 미군을 상거래 수단으로 다루는 그의 인식이 변했다는 증거가 없다. 한국 정부엔 동맹을 비난하고 민족을 부르짖는 일로 일생 먹고살던 인사들이 핵심부에 포진해 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김정은은 한·미의 이 미묘한 접점을 파고들고 있다.

우리 사회엔 북핵이 없으면 미군 없는 안보도 이제 가능하지 않으냐는 시각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가능하더라도 그런 미래가 실현될 수 있을까. 한국에서 핵을 몽땅 제거한 뒤 자신의 핵을 만든 북한의 세기말 사기극을 떠올렸으면 한다. 기적을 기대해도 좋다. 하지만 99% 사기극을 대비하는 누군가도 있어야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20/20180320032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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