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의 암살을 주도한 북한인 용의자들이 또 다른 여성에게도 ‘몰래카메라’ 출연을 제안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김정남 살해 혐의로 기소된 동남아시아 여성 2명은 달아난 북한 남성 4명에 속아 범행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로이터 등은 14일(현지 시각)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베트남 국적 증인 응우엔 빗 투이가 진술한 내용을 인용, “투이는 피고인 도안 티 흐엉(30)보다 먼저 북한인 리지현(34)으로부터 몰래카메라 출연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며 “흐엉에게 리지현을 소개시켜 준것도 투이”라고 보도했다.

흐엉은 지난해 2월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인도네시아 출신 피고인 시티 아이샤(25)와 함께 김정남의 얼굴에 ‘VX(맹독성 신경작용제)’를 발라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말레이시아 법은 고의로 살인을 저지를 경우 예외 없이 사형을 선고하도록 규정하기 때문에 살해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간주되면 흐엉과 시티는 교수형에 처해질 수 있다. 김정남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추정되는 리지현 등 북한인 4명은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생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던 사진. 중국 상하이 푸동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 페이스북 캡처

투이의 진술에 따르면 투이와 리지현은 2016년 12월 27일 처음 만났다. 하노이서 주점을 운영 중인 투이는 이날 가게를 찾아온 리지현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한국계 아버지와 베트남계 어머니를 둔 혼혈이다’, ‘얼마 전 이혼을 했다’, ‘슬하에 자식은 없다’ 등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던 리지현은 이내 자신을 방송 제작자라고 밝히며 투이에게 ‘배우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어린 아들을 돌봐야 했던 투이는 이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리지현은 투이의 거절에 ‘그럼 친구라도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했고, 투이는 평소 그쪽에 관심이 많았던 흐엉에게 전화를 걸어 리지현을 소개시켜줬다. 투이는 흐엉과 전 직장에서 약 2년간 같이 일한 사이다.

투이의 전화를 받고 가게로 달려온 흐엉은 그 자리에서 매달 1000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리지현과 계약을 맺었다. 투이는 “당시 리지현이 흐엉에게 ‘공항 몰래카메라를 준비하고 있다. 잘 차려입고 모르는 사람의 머리에 액체를 쏟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흐엉의 변호를 맡고 있는 히샴 테 포테익 변호사는 이날 이 같은 내용이 담긴 투이의 진술서를 법원에 제출하며 “말레이시아 검경이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은 채 흐엉의 진술을 일방적으로 무시했다”며 “리지현이 애초 영입하려 한 대상은 흐엉이 아니라 투이였다”고 주장했다. 실제 투이는 말레이시아 경찰의 방문조사에서 “리지현이 처음에는 내게 출연을 제안했지만 거절했다”며 “대신 다른 주점에서 한때 함께 일했던 흐엉이 연기에 관심이 많은 것이 생각나 소개해 줬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현지 경찰 당국자 완 아지룰 체 완 아지즈는 흐엉의 진술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증인 확보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흐엉은 지난해 2월 체포됐을 당시 직업을 ‘배우’라 밝힌 바 있다.

히샴 변호사는 이날 투이의 진술서와 함께 흐엉의 진술서도 제출했다. 흐엉은 진술서에서 “그날 재밌는 영상을 찍기 원하는 한국인 남성이 있다는 투이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매우 유창한 베트남어를 구사했다”며 투이의 진술을 확인했다. 흐엉은 또 하노이의 명소 중 한 곳인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첫 촬영을 진행했고,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 키스를 하라는 주문을 받았지만 상대방이 피하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진술했다.
 
김정남 살해 혐의로 기소된 인도네시아 국적 시티 아이샤(왼쪽)와 베트남 국적 도안 티 흐엉(오른쪽)이 2017년 10월 2일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피고 측은 지난해 10월 말레이시아 검찰이 증거물로 제출한 공항 내 폐쇄회로(CCTV) 영상도 문제 삼았다. 이 영상에는 피고인들이 김정남의 얼굴에 VX를 바른 뒤 자신의 몸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신속히 화장실로 이동해 손을 씻는 모습이 담겼다.

시티의 변호사인 구이 순 셍은 이날 법정에서 “시티가 범행 후 VX가 묻은 손으로 선글라스를 고쳐 쓰는 장면이 증거물로 제출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며 “이는 검경이 피고인을 유죄로 몰기 위해 증거를 취사선택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피고 측 변호인들은 지난해 10월 재판이 시작된 이래 말레이시 아 수사당국이 사건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정권에 의한 정치적 암살임에도 불구하고 당국이 이들을 희생양 삼아 외교적 파장을 최소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북한이 김정남의 시신 인도를 요구하며 자국 내 말레이시아인을 인질로 삼자, 지난해 3월 말 시신을 넘기고 암살에 연루된 북한인들의 출국을 허용하면서 관계 정상화를 선언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15/2018031500911.html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