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2월 일본 TBS와 인터뷰에서 김정일에 대해 "지도자로서 판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실용주의자"라는 말도 했다. 그 넉 달 뒤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평양에 갔다 온 김 전 대통령은 김정일을 '똑똑하고 세계정세를 많이 안다' '남의 말을 빨리 알아듣는다'고 했다. 2000년 8월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도 "(김정일은) 자상하고 통이 크고 정치적 순발력이 뛰어났다"고 극찬했다. 김정일이 저지른 아웅산 테러와 KAL 폭파도 '통 크고 순발력 좋은' 작전이었던가 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10월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에 가 만수대의사당 방명록에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 주권의 전당"이라고 썼다. 북한 주민에 '행복''주권'이라니 놀랍기도 하고 어이가 없다. 김정일을 만난 뒤에는 '평화 의지를 확인했다' '대화가 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당시 정부 인사들은 김정일을 "통 크고 대담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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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남북 정상회담 때 통전부장 한 명만 배석시켰다. 외교관 출신 한 고위 탈북자는 "거짓말하는 모습을 여러 명에게 보여주기 싫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탈북자는 김정일과 북유럽 한 국가 정상 간의 회담을 단독 배석한 적이 있다. 그는 북유럽 정상이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을 때 김정일이 분노할까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정일은 "옳은 말이다. 우린 개혁해야 한다"며 오히려 맞장구를 쳤다. 그 북유럽 정상도 그 자리에선 '통 크고 대담한 지도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제 평양에 갔다 온 대북 특사단이 김정은을 "솔직하고 대담한 스타일"이라고 했다. 고사총으로 사람의 신체를 박살 내고 화염방사기로 태워 없애고 제 이복형을 남의 나라 국제공항에서 화학무기로 독살한 것도 '대담함'에 포함될지 모른다.

▶과거 리비아 독재자 카다피를 만났던 사람은 "리비아는 문제 많은 나라이지만 1시간 늦게 나타나 비스듬히 앉아서 땀 닦은 휴지를 바닥에 버리는 카다피를 보니 저절로 공 손해졌다"고 했다. 왕(王)이나 다름없는 위치, 생살여탈권을 가진 권력 등이 만드는 '후광(後光) 효과'일 것이다. 김정은을 만난 특사단 한 명이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아 잡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 후광 효과를 실감케 된다. 앞으로 이 정부 내에서 김정은에 대한 아부성 예찬이 이어질 것이다. 북핵 폐기를 위한 전략적 덕담이기를 바라지만 입맛이 개운치 않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07/20180307029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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