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2월 베이징 톈안먼 광장 인민대회당에 인파가 몰렸다. 6개월 전 화궈펑을 당(黨) 주석으로 추대한 중국 공산당 11차 당대회에 이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열렸다. 대표 3500명은 경제 발전 10개년 계획 초안을 통과시켰다. '문화혁명'이 선동한 '계급투쟁' 대신 '경제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중국 정치 전공 조영남 서울대 교수는 중국의 개혁·개방이 '경제 건설'을 공산당의 중점 업무로 결정한 11차 당대회와 전인대에서 시작됐다고 봤다. 당대회 직후 선진국을 배우려는 경제시찰단이 대거 파견됐다는 것이다.

▶문혁 말기 '4인방'에게 숙청당했던 덩샤오핑은 11차 당대회 직전인 1977년 7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복직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70대의 덩은 한가해보이는 과학과 교육을 맡겠다고 자청했다. 당, 정, 군을 장악한 마오쩌둥 후계자 화궈펑 진영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노회한 전술이었다. 하지만 덩은 곧 외교 등 핵심 업무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북한, 일본, 싱가포르를 잇달아 방문했다. 
 
[만물상] 21세기에 '황제' 뽑는다는 中 전인대

▶일본을 찾은 덩샤오핑은 오사카 마쓰시타 공장에 들렀다.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 안내로 TV 생산 라인을 꼼꼼히 돌아봤다. 덩의 열의에 감명받은 마쓰시타는 중국 진출을 결심했다. 중국을 방문해 중국 정부와 기술 협력 계약서를 썼고, 베이징 사무소를 개설했다. 다른 일본 기업들도 뒤를 따랐다.

▶덩은 1978년 말 회의에서 "일부 도시를 먼저 부유하게 하자"는 선부론(先富論)을 폈다. 첫째로 꼽은 게 선전(深圳)이었다. 선전은 당시 강 건너 홍콩으로 도망가는 불법 월경민이 골칫거리였다. 선전을 가공무역 중심 수출 기지로 삼는 데 앞장선 이가 시진핑 주석 아버지인 시중쉰 광둥성 제2서기였다. 덩은 항일 전쟁 동지였던 시중쉰을 지원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중앙은 돈이 없다. 정책을 줄 수 있을 뿐. 목숨 걸고 혈로(血路)를 뚫어라.' 1979년 3월 설립된 선전 경제특구는 경제 개발 모델로 삼았던 홍콩의 경제 규모를 작년에 추월했다.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오늘부터 20일까지 열린다. 전인대는 헌법 개정과 국가주석·총리 선출권을 가진 명목상 최고 권력기관이다. 이번 회의는 국가주석 임기제 폐지와 '시진핑 신시대 사상' 헌법 삽입 등 '시(習) 황제' 시대를 여는 고비가 될 것 같다. 문혁 때 실각 경험이 있는 시중쉰은 마오 독재의 피해자다. 그가 살아 있다면 개혁·개방을 이끈 집단지도체제를 파기하고 독재로 가겠다는 아들을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04/20180304018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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