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펜스 부통령과 김정은의 동생 김여정을 비롯한 북측 관계자들이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만나기로 했다가 북측이 회담 두 시간 전에 취소한 사실이 21일 확인됐다. 전후 사정을 보면 북측이 펜스 부통령을 만나 봐야 얻을 게 없다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지레 포기했다는 쪽에 가깝다.

1월 말쯤 북이 먼저 '만나자'는 뜻을 전해 왔다고 한다. 미국이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북한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자"고 했던 것도 이런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펜스 부통령은 '북은 핵무기 프로그램과 탄도미사일 야욕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반복했다. 북측을 만나도 같은 말을 하겠다는 점도 밝혔다. 펜스 부통령은 한국에 오면서 북한에서 사망한 오토 웜비어의 부친과 동행했다. 북측과 면담 예정일 하루 전인 9일에는 천안함을 둘러보고 탈북자들과 만났고, 그날 저녁엔 김여정·김영남과 같은 식탁에 앉기를 거부하고 만찬장을 나갔다. 모두 계산된 대북 메시지였다. 북측에 "나를 만나도 들을 얘기는 핵·미사일의 폐기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펜스 부통령의 말과 행동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김정은도 보고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판을 깬 것이다.

북측은 미국과의 만남을 취소한 상태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이른 시일 내에 평양에 오시라"며 정상회담 카드를 던졌다. 당장은 미국의 입장 변화가 어려운 만큼 남측과 먼저 대화하면서 시간을 벌고 남으로 하여금 미국을 변화시키게 하겠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역대 미 행정부는 남북이 대화 테이블에 앉겠다고 하면 한반도 문제 당사자들인 점을 고려해 지지 입장을 밝히고 뒤에서 지켜보는 편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북한 핵이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시점이 임박했다'는 판단이 선 이후 미국은 북핵을 자국의 안보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미국은 북핵이라는 위협을 제거하는 데 외교 안보 역량을 모두 쏟아붓고 있고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은 누구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자세다.

문 대통령은 10일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받았을 때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키자'고 답했다. 실제 그럴 생각이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일주일 만인 17일엔 "남북 정상회담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고 했다. 어떻게든 미·북을 한자리에 앉혀보려 한 우리 정부 노력에 대한 미국의 거부 의사를 분명히 확인했다는 얘기다. 미국이 "북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협상은 없다"는 점에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이런 사정을 북측에 분명히 전달해 북이 '통남봉미(通南封美)'라는 우회로를 통해 '핵 있는 평화'라는 자신의 목적지로 가겠다는 헛된 꿈을 버리도록 하는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21/20180221032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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