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프랑코 독재 끝난 뒤 內戰 상처 치유 '망각협정' 맺어
우리의 '과거사 흔들기'와 대비… 스페인 신중한 대처 주목할 만
 

김기철 논설위원
김기철 논설위원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시내에서 50㎞쯤 떨어진 '전몰자의 계곡'은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숨진 희생자 4만명이 묻힌 추모 공원이다. 댄 브라운 신작소설 '오리진'에도 등장한 이곳을 향해 렌터카로 30분쯤 달리다보니 바위산 위에 솟은 150m 높이 거대한 십자가가 다가왔다. 프랑코 정권이 내전의 상처를 치유한다며 세운 기념물이다. 십자가 아래 바위산을 250m 뚫어 만든 동굴 성당도 바티칸 성당을 떠올릴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제단(祭壇) 앞 바닥엔 프랑코의 유해가 묻혀 있었다. 그는 1936년 쿠데타를 일으켜 좌파 공화정부를 뒤엎고 1975년까지 집권한 인물이다. 성당 앞쪽 작은 예배소에는 '1936~1939년 희생된 영령들을 위하여'란 명문(銘文)이 나붙었다.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던 프랑코 반군과 정부군 희생자가 한데 나란히 묻혔다는 뜻이다.

스페인 내전은 전사자 30만명, 테러 희생자 10만명에 전쟁 중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숨진 이들까지 더하면 100만명 넘는 사망자를 냈다. 프랑코 정부는 집권 후 10년간 5만명 넘는 정치범을 처형할 만큼 강압통치를 폈다. 종전 다음해인 1940년 착공해 1959년 개관한 '전몰자의 계곡' 건설에는 죄수들과 정치범들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그래서 프랑코 독재체제의 유물(遺物)로도 비판받는, 요즘 말로 하면 '적폐'다.

1936년 여름 장갑차 위에 올라간 스페인 무정부주의자 민병대원들. 스페인 내전은 3년 뒤 반군의 승리로 끝났다. /조선일보 DB
1975년 프랑코가 세상을 뜬 후 이 나라에서도 치열한 과거청산 전쟁이 벌어질 법했다. 하지만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스페인은 독재에서 민주화로 이행한 대표적 성공모델로 꼽힌다. 학계에선 스페인 사회가 내전의 상처를 헤집기보다 덮는 방식으로 치유의 길을 택하는 '망각협정'을 체결했다고 평가한다. 1982년부터 14년간 좌파 사회노동당 정부를 이끈 펠리페 곤살레스 총리는 훗날 "만일 역사적 기억을 회복하려고 했더라면 잿속에서 꺼지지 않고 이글거리고 있던 구원(舊怨)의 불씨를 다시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2006년 호세 사파테로 총리가 '역사적 기억법'을 제정하면서 과거 청산이 다시 떠올랐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프랑코 반군 못잖게 공화파 역시 가톨릭 신부와 수녀 7000명을 학살하는 등 양쪽 모두 과거에 책임이 있다는 국민적 공감이 정치권의 조용한 과거사 해결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전몰자의 계곡'은 한때 폐쇄론까지 나왔으나 프랑코 시대를 증언하는 유산으로 보존돼 연 30만명 넘는 방문객이 찾는다.

스페인식(式) 과거사 처리 방식에 대해 지나치게 온건하다거나 불철저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내전의 교훈을 가슴에 새긴 스페인 사회가 합의한 "과거의 상처를 헤집지 않는다"는 정신은 눈여겨볼 만하다. 전(前) 정권과 전전(前前) 정권은 물론 박정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적폐를 청산한다며 역사를 정쟁(政爭)으로 삼는 문재인 정부의 과거사 흔들기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 기념사업에는 막판까지 예산 배정을 미적거리면서 정부 수립에 반대해서 일어난 4·3 사건 70주년 기념사업엔 수십억원씩 나랏돈을 챙겨줬다. 대통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은 얘기하면서 몇 달 채 남지 않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년은 모른 체한다. 자유민주주의와 6·25 남침, 북한 인권 문제를 삭제한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집필 시안(試案)은 또 뭔가. 국민을 갈라놓는 '역사 전쟁' 카드를 아무렇잖게 꺼내는 일을 자주 겪다보니 과거사를 신중하게 다루는 스페인의 저력을 다시 보게 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13/20180213029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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