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은 예외, 예외… "희망적 사고에 집착, 대북제재 허물고 있다"]

현송월 육로, 만경봉호는 바다
김영남이 고려항공편으로 오면 北 발묶은 제재 모두 '예외' 인정
일각선 "국제사회의 공조 깬다"

南北대화→美北대화 큰그림에 마식령 전세기, 北 체재비 지원
정부, 저자세 감수하고 北에 '성의'… 北은 약점 잡은듯 제재 의지 시험
청와대 "전쟁·평화 갈림길에서 평화 불씨 살리려 애쓰고 있다"
 

정부는 6일 북한 예술단이 타고 온 만경봉92호 유류(油類) 공급 문제를 놓고 "지원한다" "결정되지 않았다" "미국과 협의 중이다" 사이를 오갔다. '유류 지원량이 유엔 안보리 제재 한도 내에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일찌감치 지원 방향을 세웠지만 '대북 제재 취지를 근본적으로 허무는 것'이라는 논란을 의식해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날 정부 안팎에서는 북한 대표단 단장으로 방문하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미국의 제재 대상인 고려항공 이용을 요구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이를 받아주면 북한에 '육·해·공 길'을 모두 열어주는 셈이 된다. 지난달 현송월이 이끈 예술공연 점검단은 경의선 육로 군사분계선(MDL)을 통과했고, 이날 만경봉호는 동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왔다.

최근 이처럼 대북 제재를 둘러싼 논란과 혼선이 끊이지 않는 것은 현재 문재인 정부가 '평창 딜레마'에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정부는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통해 '남북 대화→미·북 대화→북핵 문제 출구'로 이어지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를 위해 '제재 위반, 저자세 논란'은 감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만경봉호와 ‘태극기 시위대’ - 북한 예술단을 태운 만경봉 92호가 6일 오후 강원도 동해 묵호항에 입항하고 있다. 굴뚝에 인공기가 그려져 있다. 이날 묵호항에서는 보수 시민단체 회원 200여 명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입항 반대 시위를 벌였다. 북한 예술단은 오는 8일 강릉, 11일 서울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만경봉호와 ‘태극기 시위대’ - 북한 예술단을 태운 만경봉 92호가 6일 오후 강원도 동해 묵호항에 입항하고 있다. 굴뚝에 인공기가 그려져 있다. 이날 묵호항에서는 보수 시민단체 회원 200여 명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입항 반대 시위를 벌였다. 북한 예술단은 오는 8일 강릉, 11일 서울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고운호 기자

하지만 현재 돌아가는 상황은 정부의 기대와는 간극이 크다. 북한은 평창 참가를 남한에 대한 시혜로 여기며 "핵 문제는 꺼내지도 말라"고 하고 있다. 미국은 이런 북한에 대해 인내심의 한계를 보이며 '군사 옵션'을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정황이 확인되고 있다. 중요한 연결고리인 '미·북 대화' 견인이 현시점에서 현실성이 매우 낮다는 얘기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문 대통령이 '위시풀 싱킹(wishful thinking·희망적 사고)'에 빠져 미·북 대화를 기대하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공조만 허무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이미 미국 등 국제사회에서는 "한국 정부가 예외를 남발하면서 대북 제재 원칙을 허물고, 이제 막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제재를 앞장서서 흔들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미 국무부 동아태 대변인이 5일(현지 시각) 만경봉호 제재 위반 논란과 관련된 질문에 "한국 정부에 문의하라"고 한 것은 미국의 불쾌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국정연설서 남북 대화를 언급 않고 대북 제재만을 강조한 것은 한국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은 한국 정부의 '성의'에 화답하기는커녕 약점을 파고들며 한국의 제재 의지를 끊임없이 흔들어대고 있다. 북한은 남측에서 '제재 위반 논란'이 거세게 일자 이달 초 예정됐던 금강산 문화 행사를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언제든 대화 중단하고 돌아갈 수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위협으로 남측 정부를 길들이겠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김여정, 평양서 예술단 배웅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오른쪽 빨간 원) 당 부부장이 지난 5일 평창올림픽 축하 공연을 위해 평양에서 출발하는 북한 예술단을 전송하고 있다.
김여정, 평양서 예술단 배웅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오른쪽 빨간 원) 당 부부장이 지난 5일 평창올림픽 축하 공연을 위해 평양에서 출발하는 북한 예술단을 전송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문제는 이런 북한의 의도를 뻔히 읽으면서도 북한에 끌려가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한 번 뚫린 제재의 구멍이 계속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6일 오전 통일부 당국자는 브리핑에서 만경봉호 지원과 관련,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전례에 준해서 음식, 기름 등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2시간여 만에 통일부가 "현재 북측이 요청하지도 않았고, 편의 제공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결정된 바 없다"는 정정 메시지를 보냈지만 정부 안팎에서는 지원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정부 소식통은 "만경봉호 입항을 받아줬으면서 '기름은 제재 대상이니 안 주겠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애초에 우리 5·24 조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만경봉호 입항을 허가했을 때부터 예고된 문제라는 것이다. 정부는 5일 만경봉호와 관련해 "평창의 성공적 개최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예외 조치를 적용한다"고 발표하고 관계부처 회의를 열어 지원 플랜을 일사천리로 세웠다.

이에 앞서 정부는 정례적으로 2월 말~3월 초 시작하던 한·미 연합 훈련을 올림픽 이후로 연기했고, 마식령스키장 공동 훈련 때는 미국에 협조를 요청해 아시아나 전세기를 띄웠다. 모두 '평창 예외'가 적용된 사례다.

만경봉호에 오른 우리 검역관들 - 북한 만경봉 92호가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에 접안한 가운데 한국 검역관들이 검역하기 위해 배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태극기가 달린 옷을 입은 검역관들 뒤로 북한 측이 만경봉호 내부에 붙여 놓은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문구가 보인다.
만경봉호에 오른 우리 검역관들 - 북한 만경봉 92호가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에 접안한 가운데 한국 검역관들이 검역하기 위해 배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태극기가 달린 옷을 입은 검역관들 뒤로 북한 측이 만경봉호 내부에 붙여 놓은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문구가 보인다. /연합뉴스

앞으로도 이 같은 예외 적용은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당장 김영남의 고려항공 이용 가능성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 통일 멘토 중 한 명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날 라디오에서 "(고려항공으로 오겠다면) 논란이 안 일어나게 하는 게 좋다. 절차 문제를 가지고 분란을 일으키면 남의 나라 보기에 창피하다"고 했다. 또 다른 대통령 멘토인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연합 훈련과 관련해 "연기가 아니라 축소·취소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펴고 있다.

정부 내에서도 국제사회의 눈총을 받으며 북한에 끌려다니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는 기색이 감지된다. 그렇지만 청와대가 내세우는 '한반도 평화'라는 대전제에 묻혀 이견을 표출하지는 못하고 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이날 서면 브리핑 중 "지금 한반도가 전쟁이냐, 평화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언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평화의 불씨를 살리려고 애쓰고 있다"는 부분은 청와대가 현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방한(訪韓)하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문 대통령의 '미·북 대화' 기대와는 달리 북한 정권의 잔혹함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정을 통해 강력한 대북 메시지를 발신할 것으로 알려졌다. 조셉 윤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우리 측 관계자들에게 "펜스 부통령은 어떤 종류의 대화에도 열려 있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8일 예정된 북한의 건군절 열병식에 미국 본토를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등장하면 미·북 대화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고위 외교 소식통은 "평창을 계기로 북한과의 대화 모멘텀을 살리는 것은 좋지만, 자칫 한·미 동맹에 금이 가지 않도록 정부가 고도의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07/20180207002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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