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의 '민족 공조' 득세하면서 韓·美 공조는 뒷전으로 밀려나
미국 틀어막고 한국과 통하는 북의 封美通南은 '시간 벌이'용
北核 폐기라는 전제 흔들리면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질 수도
 

류근일 언론인
류근일 언론인

평창올림픽이 지구인들의 평화의 축제가 돼야 한다는 데 이의(異議)를 달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런 당위론 이전에 한반도 상황에서 평화란 무엇이냐를 먼저 따져야 한다는 점이다. 한반도 상황이란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가 대치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현실은 자유와 전체주의를 한 그릇에 담을 수 없기에 있는 것이다. 이 둘을 그러나 한 상(床)에 놓을 수 있다고 하는 평화론(論)이 곧잘 있어 왔다.

'민족'이란 수사학이 그 대표적 사례다. "민족은 동맹에 우선한다"는 말도 있었다. 해방 후 지금까지 '민족' 수사학은 우리 현대사에 끊임없이 등장해 왔다. "체제 따질 것 없이 한민족끼리 손잡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처럼 근사해 보이면서도 엉성한 수사학도 없다. 어떤 체제로 가느냐를 미룬 채 우선 손부터 잡고 보자는 것은 자유 체제를 잡으려는 전체주의 혁명가들의 덫에 불과하다.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가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과 손잡았다가 잡아먹힌 사례가 그랬다. 전체주의 혁명가들은 포섭 대상을 향해서는 "체제를 넘어서라"고 유인(誘引)하지만,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체제에 집착한다. 정치범수용소를 그들이 넘어설 수 있나?

남(南)베트남 패망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서 남북이 한 나라가 됐으면 좋은 것 아니냐'고 말하는 부류도 있다. 그들의 눈에는 자유로운 체제냐, 전체주의 1당 독재냐는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무조건적 통일보다 '자유냐 전체주의냐?'를 더 중요하게 따지는 사람들이 이룩해 왔다. 이 70여년의 노력을 뒷받침한 힘 중 하나가 바로 한·미(韓·美) 동맹이었다.

한·미 동맹은 가치관과 생활양식이 같은 나라들끼리 협력하자는 것이었다. 한국인과 미국인은 민족에 있어선 서로 멀다. 그러나 자유를 사랑하는 한국인들이라면 동족이라곤 하지만 김정은 폭정하에서 사는 게 더 낫다고 여길까, 아니면 한·미 동맹이 지켜주는 자유 체제에서 사는 게 더 낫다고 여길까? 대한민국은 민족은 달라도 한·미 동맹에 의한 평화가 훨씬 더 좋다고 믿는 사람들이 가꾸어 온 나라다. 요즘 들어 이 흐름은 그러나 더 이상 지속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한·미 공조를 누르고 이른바 '민족 공조'라는 게 득세하고 있다. "남북 관계가 풀리면 한·미 동맹을 축소할 수 있다"고 한 당국자의 말이 그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남북은 17일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여를 위한 차관급 실무회담에서 11개항의 공동보도문을 채택했다. 공동보도문에는 평창 동계올림픽대회 개막 전 북측 금강산 지역에서 남북 합동 문화행사와 북측 마식령스키장에서 남북 스키선수들의 공동훈련을 진행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사진은 2013년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완공된 마식령스키장에서 리프트를 타고 시찰하는 모습. /연합뉴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김정은은 갑자기 봉미통남(封美通南·미국을 틀어막고 남한과 통하는) 전술로 나왔다. 그렇게 해서 시간도 벌고, 핵전력도 완성하고, 남한도 흔들어놓고 한국과 미국 사이에 쐐기도 박겠다는 것이다. 전체주의 혁명가들에게 정직성을 기대할 순 없다. 혁명의 대상에 대한 그들의 모든 말과 행동은 철저하게 이중적(二重的)이다. 이걸 간과한 채 '우리 민족끼리' 흥분 속에서 마냥 폭주했다가는 '부산행 좀비 열차'가 따로 없을 것이다. 전체주의 혁명가들의 전략전술엔 힘에 기초한 당당함만이 답이다.

지난주 캐나다에서 열린 '한반도 안보와 안정에 관한 밴쿠버 외교장관회의'는 그래서, 대화를 위해서라도 해상 차단 등 대북 제재를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이런 판에 정작 피해 당사자인 우리는 한·미 공조에서 빠져나와 김정은-시진핑-푸틴과 함께 춤을? 한·미 동맹은 이미 '메달권(圈)'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고 해야 할 듯싶다.

한국 정부가 정히 이렇게 나갈 경우 미국인들이라 해서 배알이 없을 리 없다. 미국의 일부 정치인과 장성(將星)·논객(論客)들은 이미 주한 미군 철수, 미국인 가족 대피를 언급하기도 했다. 우리 안의 일부는 "그래, 우리가 노려온 게 바로 그거였어"라며 희희낙락할지 모르겠다. 미국은 아직은 북한 핵 폐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여차하면 핵 폐기 대신 동결(凍結), 미·북 평화협정, 주한 미군 철수로 급선회할 수도 있다.

이건 물론 최악의 경우다. 이걸 막기 위해 한국의 자유인들과 미국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손 을 잡아야 한다. 한국엔 한·미 가치(價値) 동맹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과소평가하거나 김정은과 어중간하게 타협하는 것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퇴조로 이어진다는 것을 미국 조야(朝野)에 알려야 한다. 태극기 처지가 여자 아이스하키팀 처지다. 이것도 촛불의 명령인가? 자유인들의 혼신(渾身)의 몸짓이 절실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22/20180122026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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