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은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을 통해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자고 했다
그에게 '민족의 위상'은 물론 '핵강국' 북한이다
 

선우정 사회부장
선우정 사회부장
올림픽 때마다 '앰부시(ambush·매복) 마케팅' 논란이 일어난다. 규제를 살짝 피한 광고로 올림픽 후원자가 비싼 돈을 지급하고 누리는 홍보 효과에 올라타는 것이다. 한·일월드컵 때 이 방법으로 큰 재미를 본 SKT는 이골이 난 듯 평창올림픽에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엔 족탈불급의 강적을 만났다. 북한이다.

이 나라는 눈치도 안 본다. 편승 정도가 아니라 주인 자리에 올라탈 태세다. 상대가 만만하기 때문이다. 먼저 태극기를 국적 불명의 한반도기로 바꿔 주최국 상징을 지웠다. 북한이 요구하기도 전에 한국이 알아서 했다. 중국 위력에 국기를 들지 못하는 대만 신세다. 정부는 "아시안게임과 유니버시아드 때도 그랬다"며 별일 아니라고 한다. 비교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나. 세계 32억명이 보는 동계올림픽이다.

북한이 보낼 수 있는 올림픽 선수는 10명이 안 된다. 그런데 '삼지연 관현악단'이란 악단을 140명이나 보내기로 했다. 이름이 비슷한 '삼지연악단'이 북한에 있다. 김정일·김정은 체제 선전곡을 부르고 연주하는 악단이라고 한다. 여기에 유명한 '모란봉악단'을 섞어 악단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모란봉악단 대표곡이 가관이다. '자나깨나 원수님 생각' '우리의 총창 우에 평화가 있다' '그이 없인 못살아'. 여기서 '그이'는 물론 '김정은 원수님'을 뜻한다. 그들이 한국에서 무슨 공연을 할지 깜깜하다.

'미녀' 수식어를 버릇처럼 붙이는 북한 여자 응원단도 또 들이닥칠 태세다. 이들이 배바지를 입고 펼치는 딱따기 응원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하지만 "하늘의 태양이신 수령님 영상(사진)을 썩은 통나무에 매달 수 있느냐"며 광분하던 집단 히스테리는 정말 괴로운 광경이었다. 북한에선 선수나 악단이나 응원단이나 모두 '수령님 명령을 수행하는 혁명가(革命家)'라고 한다.

북한은 한국을 잘 부린다. 2002년 연평해전 석 달 뒤 열린 부산 아시안게임에 북한은 여자 응원단 288명을 보냈다. 북한 TV는 "평양의 미녀 응원단이 남녘을 사로잡았다"고 떠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청년 6명이 산화한 참수리호 비극을 누구도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평양 미녀에게 홀렸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이때 기가 살았는지 이듬해 다시 들이닥친 북한 응원단은 현수막 집단 히스테리까지 일으켰다. 이번엔 어떤 방식으로 '북핵(北核)'을 잊게 할까.

한국에서 열린 세계적 스포츠 잔치는 이번이 세 번째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은 여객기를 떨어뜨렸다. 114명이 사라졌다. 월드컵 땐 연평해전을 일으켜 축제에 찬물을 끼얹었다. 과거 두 차례 모두 폭력으로 답했다. 그것도 잔인무도한 폭력이었다. 세 번째도 핵으로 위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미소를 보냈다면 일단 저의(底意)를 의심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미사일을 쏴 잔치를 엉망으로 만들지 않는 것만도 황공하다. 자진해 국기(國旗)를 떼겠다더니 수령님 찬가도 눈감아줄 판국이다. 이게 '핵(核) 인질'이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의도를 정확하게 밝혔다. 2017년을 핵 강국을 달성한 해로 정했다. 2018년은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해로 규정했다. '민족의 위상'이 한국의 위상일 리 없다. 핵 강국 북한의 위상이다. 이를 과시하는 기회로 김정은이 거론한 이벤트가 '공화국 창건 70돌'과 '남쪽의 겨울철 올림픽'이다. 남의 올림픽에 올라타 핵 강국의 위상을 과시하겠다는 소리다. 변변한 선수가 없으니 '미녀'를 동원한다. 역사에 남을 '앰부시 마케팅'이라 할 만하다. 중학생이 들어도 알아들을 이런 문맥(文脈)을 정부만 못 읽는다. 화해의 신호라고 한다.

악몽은 북한의 정상이 평창에 오는 것이다. 정권 일부에선 현실로 만들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극적이다. 가능성이 작지만 실현되면 민족의 일대 이벤트로 포장돼 많은 사람이 환호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눈은 다르다. 핵무기로 세계를 위협하는 나라, 사람 목 숨을 개털처럼 여기는 나라다. 그 정상이 우뚝 선 올림픽에서 세상은 무엇을 느낄까. 1936년 열린 베를린올림픽, 1940년 열릴 뻔한 도쿄올림픽을 떠올리면 된다.

북한의 올림픽 참가는 선수 10명과 코치 몇 명이면 족하다. 수상한 악단, 괴상한 응원단, 우리 청춘의 꿈을 빼앗는 낙하산 선수는 제발 오지 마라. 평창에서 열리는 잔치는 쇼가 아니라 올림픽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16/20180116030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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