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준 스포츠부 기자
석남준 스포츠부 기자

요즘 평창올림픽을 둘러싼 남북 논의를 보면서 지난해 4월이 떠올랐다. 기자는 당시 여자 축구 아시안컵 예선 취재를 위해 엿새 동안 평양에 머물렀다. 지난 9일 남북 고위급 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군사분계선(MDL)을 넘어온 북한 인사 중에는 지난해 평양에서 만났던 인물도 포함돼 있었다.

평양에서의 6일은 철저히 통제된 생활이었다. 숙소인 평양 양각도호텔과 김일성경기장 외에는 움직일 수 없었다. 호텔 문밖으로 산책도 나갈 수 없었다.

평양에 도착한 지 나흘째인 4월 6일 북한 측은 대한축구협회 임원진과 취재진을 평양의 한 식당(고려동포회관)으로 안내했다. 이례적인 외출이었다. 한국과 인도의 여자 축구 경기에서 북한 관중이 일방적으로 인도를 응원한 다음 날이었다.

고려동포회관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갑자기 '북한 봉사원'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사전 예고가 없던 예술 공연을 시작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북한 봉사원들은 '고향의 봄' 등 낯익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네 번째 곡에서 "인민이 제일 좋아하는 우리 아버지" "우리 원수님" 따위의 가사가 들렸다. 우리 측에서 "이거 뭐야"라는 말이 나왔다. 몇몇이 우리 정부 측 인사에 문제 제기를 했고, 결국 공연은 중단됐다. 알고 보니 이 곡의 제목은 '친근한 우리 원수님'이었다. 김정은 지시로 만들어진 청봉악단이 2015년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발표한 곡이다. 소동이 있은 뒤 북한은 취재진이 평양을 떠날 때까지 외출을 허용하지 않았다.

북한 청봉악단 공연 모습. /조선일보 DB
북한은 동계 스포츠가 취약한 나라다. 대한체육회에선 많아야 10명 정도의 선수가 평창에 올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이 공들이는 건 예술단이다. 스포츠로 평창 주인공이 되긴 어려우니 예술로 '우회 기동'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15일 북한 예술단 파견 관련 남북 실무 접촉을 위해 나온 북한 대표단에는 현송월 관현악단 단장이 있었다. 현송월은 2015년 12월 모란봉악단의 중국 베이징 공연 개막 3시간을 앞두고 취소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중국 측이 김정은 숭배 일색 공연에 난색을 표하자 현송월 등은 "우리 공연은 원수님(김정은)께서 직접 지도해주신 작품이기 때문에 점 하나 뺄 수 없다"고 맞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을 평창올림픽의 '만병통치약 '으로 여기는 듯한 현 정권을 보면서 북한 예술단이 평창에서 갑자기 '친근한 우리 원수님'을 부르는 상상을 해본다. 체제 선동이 주업인 북한 예술단이 노골적인 찬양가는 아닐지라도 '은근하고 비유 섞인 찬양가'를 들고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분위기에서 이런 공연을 누군가 중단시킬 수 있을까. 평양에서의 황당함을 평창에서 다시 겪는 건 아닐지 걱정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15/201801150295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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