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獨은 1956년부터 단일팀 구성
하지만 冷戰에 체육 교류 얼어붙고 동독 체제 宣傳에 이용당하기도
스포츠가 기여한 건 統獨 이후 통합
 

민학수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민학수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이 체육 교류의 물꼬를 트기로 했다는 합의를 들으면서 10여년 전 독일 시절이 생각났다. 당시 회사 연수로 독일 스포츠 전문지(誌) '키커'에서 현지 기자들과 함께 1년간 지냈다. 독일인은 무뚝뚝하다는 선입견이 있지만 자주 어울리던 50대 전문기자는 맥주 한잔 들어가면 이야기를 술술 잘했다. 그는 동베를린에 있는 지인 만나러 가다 검문소에서 겪은 아슬아슬한 순간을 포함해 분단 시대의 경험을 얘기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쥐트 코레아(남한의 독일 발음)에서 왔으니 잘 알 것"이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통일에 이른 독일은 당시 국제정치와 경제·사회 상황이 우리와는 판이하지만 그래도 본받고 싶은 통일의 성공 사례임이 분명하다.

한국에는 동·서독의 활발한 체육 교류가 통일로 가는 문을 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독일인들에게 그런 질문을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다. 당시 그 기자도 "교류는 많았지만 정치 상황에 따라 스포츠 교류가 춤을 추곤 했다"며 "스포츠가 정치를 바꾼 것은 아니다"고 했다. 동·서독은 이미 1956년 호주 멜버른올림픽에 단일팀을 구성해 참가했다. 동·서독 단일팀은 1964년 도쿄올림픽까지 이어졌다. 동·서독은 1957년 한 해에만 1530회의 스포츠 교환 경기를 벌였고, 그해 참가 인원은 3만5800명에 달했다. 그러나 1961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면서 단일팀을 위한 올림픽 선발전을 제외한 나머지 체육 교류는 얼어붙었다. 1970년 스포츠 교류 횟수는 10회에 그쳤다.

1974년 동·서독은 스포츠의정서를 맺으며 활발한 스포츠 교류를 재개했다. 이보다 2년 앞서 통행조약과 기본조약을 체결한 다음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과 1984년 LA올림픽에서 동·서독은 다시 '진영'으로 갈라졌다. 동·서독 간에 활발했던 스포츠 교류가 상위의 정치적 흐름까지 바꾸지는 못했던 것이다. 스포츠 강국(强國)으로 알려졌던 동독이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해 무차별 도핑을 시도했다는 사실도 이후 밝혀졌다.

분단 시대 독일의 스포츠 교류와 스포츠 클럽에 대한 연구를 한 민두식 박사는 이렇게 진단한다. "독일에선 스포츠가 통일의 물꼬를 텄다기보다는 스포츠가 통일의 후유증을 치유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가 많아요."

독일은 올림픽 같은 이벤트성 교류 외에도 오랜 기간 다양한 종목과 다양한 지역의 스포츠 교류를 이어왔다. 이런 밑바닥 노력이 통일 후에도 스포츠를 넘어 다른 분야에서도 원활한 통합에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통일 후 독일 정부는 서독 지역의 주민 복지 시설인 스포츠 클럽을 동독 지역으로 확산하는 데 공을 들였다. 동독 지역에 많은 수의 경기장과 주민 체육 시설을 지은 다음 이를 바탕으로 스포츠 클럽을 활성화했다. 이는 서독이 1950년대 후반부터 국민 누구나 어디서나 쉽게 체육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황금 플랜'을 동독 지역에 적용한 것이다. 현재 독일인 세 명 가운데 한 명꼴로 스포츠 클럽에 가입해 있다. 총인구 8200만명인 독일에는 9만개의 스포츠 클럽이 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2003년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등 한국에서 열린 스포츠 행사에 연속으로 남북 동시 입장이 이뤄지고 북한 응원단이 온 일이 있었다. 하지만 떠들썩했던 그 이벤트가 정치를 바꾸는 것은 고사하고 스포츠 분야 의 꾸준한 교류로도 이어지지 못했다.

지난해 6월 태권도 시범단을 이끌고 온 북한의 장웅 IOC 위원은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한국 인사들이 스포츠 교류를 제의하자 "스포츠 위에 정치 있다"는 한마디로 일축했었다. 이번 평창 교류도 '스포츠'가 아닌 '정치'가 위에서 결정한 것이다. 독일 사례를 보면 스포츠가 진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09/20180109031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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