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파상 '여자의 일생'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1960년대에는 거의 모든 여고생들이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으며 여 주인공 잔느의 불운을 가슴 아파했다.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여학교를 갓 졸업한 순진무구한 잔느는 잘생긴 줄리앙의 그윽한 눈길에 속수무책으로 매혹당하고 만다.

결혼을 하자 줄리앙은 잔느 집의 재산을 관리하며 하인이나 소작인들에게 인색하게 굴고 외모는 지저분해지고 그윽하던 눈길은 사나워진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잔느와 결혼도 하기 전에 잔느의 하녀를 임신시킨 사실이 드러난다.

잔느는 줄리앙의 본성을 알고는 노엽고 역겨워하며 그에게 냉랭해진다. 하지만 외아들 폴에게는 완전히 맹목적 애정으로, 저택도 팔고 땅도 팔아 빚을 갚아주고도 무시(無視)를 당해도 아들의 사랑을 애걸 또 애걸할 뿐이다.

지난 1일 김정은의 신년사에 담긴 러브콜에 대한 우리 정부의 반응은 눈먼 사랑에 빠져 짝사랑의 부름을 기다려온 순정녀를 연상시켰다. 하긴, 북한의 러브콜이 세련됐기는 했다. '동포'에게 '따듯한 인사'를 보내며 남·북한 간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우리 민족 문제는 우리끼리 해결해서 민족의 위상을 세계에 과시하자는, 순진한 여성을 충분히 현혹할 만한 미끼를 던졌다.

남북한 관계는 남한의 월등한 경제 규모와 문화 수준, 국제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특히 '국민의 정부'이래 항상 우리가 북한의 선심(善心)을 애걸하는 저자세였고 북한은 우리에게서 갈취할 것을 다 갈취하고도 우리에게 '시혜자'로 군림하는 형세였다.

김신조 사건 이후에도, 판문점 도끼 만행 이후에도, 아웅산 학살 이후에도, 북한은 사과하지 않았다. 우리는 박왕자씨 살해 후 금강산 관광 중단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후 개성공단 폐쇄 외에는 강력한 항의 조치도 못했고 얼마 안 가서 다시 '퍼주기'를 하며 응원단 파견 같은 북 한의 '선심'에 황송해 했다. 접대에 허리가 휠망정. 이제 평창에 북한 선수들이 온다면 크루즈선 제공같이 드러나는 환대만 있을까?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느니 폐허를 만들겠다느니 하고 온갖 위협을 일삼던 폭력배가 갑자기 '정의롭고 평화로운 새 세계를 구축'하는 일을 우리 민족끼리 의논하자는데, 흉기는 거두지 않아도 좋으니 사랑만 읊어 달라고 매달려야 할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08/20180108025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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