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일

따뜻한 봄날이다. 내 고향 함북 온성에는 3월까지 뼛속까지 시린 찬바람이 분다. 지금쯤은 강가에 버들강아지가 필 것이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96년 3월, 나는 오랜 군복무를 마치고 부모님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실은 말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월급도 배급도 없이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먹을 것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으며 가정이 파탄나는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직장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부모님을 도와 화전(火田)을 일궈 살림에 보태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괭이와 삽을 메고 산으로 향했다. 부지런한 자의 입에는 거미줄이 쳐지지 않고 땅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북한주민들의 생활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해 도시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장사를, 시골에 가까운 사람은 화전을 일구는 쪽을 택해 스스로 살길을 찾고 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제대하기 전에 이미 화전을 일궈 놓으셨다. 하지만 우리집 식구가 모두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너도나도 화전을 일구고 있었다. 큰 나무, 작은 나무 할 것 없이 잘려 나가고 조금씩 조금씩 산들은 헐벗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해가 져서 컴컴해질 때까지 풀떡과 풀죽을 먹으며 괭이로 뿌리를 들춰내고 땅을 헤집었다. 따가운 봄볕에 살갗이 까맣게 타고, 입술은 갈라 터지고 온종일 괭이질에 손바닥에는 물집이 생겨 진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다시 기막힌 현실이 펼쳐졌다. 당간부·보위부원·보안원들은 손에 흙 한 번 묻히지 않고 당과 수령 운운하며 우리가 피땀 흘려 일군 땅을 빼앗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배급도 어느 정도 나오고 있었는데도 우리더러는 『장군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순박한 사람들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갔다.

주민들은 땅을 빼앗기면 또 다른 곳에 땅을 들추어 씨앗을 뿌렸다. 가뭄이 들면 곡식도 말라죽고 또 그나마 겨우 올라온 싹도 병해충에 병들고 죽어갔다. 열매를 맺을 때면 사람들은 도둑을 막기 위해 초막을 세우고 밤을 지새워야 했다. 조금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누군가 싹쓸이해 가버려 허망함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96년 그 해 열심히 일해 나는 600평 정도의 땅을 일궜다. 그전에 있던 뙈기밭까지 합해 1000평을 만들었다. 옥수수·수수·콩 등을 심었다. 산에 일군 땅이라 메말라서 그대로 심을 수 없어서 어렵게 비료를 구하거나 산등성이까지 인분을 날라다 주는 사람들에게 대가를 주고 구해다 뿌렸다.

확실히 굶어 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갔다. 그해 내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정권이 타도한 지주도 될 수 있고, 자본가도 될 수 있으며, 상인도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가족들과 함께 북한을 떠나 한국으로 왔다. 혹독한 수탈만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 고향 언덕에서 화전을 일구고 있을 것이다.
/함북 온성 출생·98년 탈북·대전시 보건공무원.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