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6·25전쟁이 끝난 후 전후복구와 사회주의혁명을 추진하면서 농업협동화를 중요 과제의 하나로 제시했다. 개별 농민들을 사회주의적 집단경영 형태인 농업협동조합에 망라시키는 농업협동화 구상은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던 1952년 중순 경 이미 움트고 있었으며, 1953년 8월 전후(戰後) 처음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당의 공식 방침으로 결정됐다.

제6차 전원회의 결정에 따라 1953년 말부터 경험적으로 각 군마다 3∼4개의 농업협동조합이 조직돼 운영되기 시작해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후 1954년 말∼1956년까지 「대중적 발전단계」를 거쳐 1958년 8월 전반적으로 마무리됐다. 1958년 10월부터 몇 개월 사이에는 마을단위로 조직돼 있던 협동조합이 리(里)를 단위로 하나의 협동조합으로 통합되고 소비협동조합과 신용협동조합도 모두 농업협동조합에 편입됐다.

농업협동조합이 리 단위로 통합되면서 그전에 1만3309개였던 조합 수가 3843개로 줄어들고 평균규모는 80호(戶)에서 약 300호로, 경지면적은 130정보에서 500정보로 늘어났다. 농업협동조합은 1962년 순차적으로 협동농장으로 개편된다.

북한은 농업협동화를 추진하면서 빈농에 의존하고, 중농과는 동맹을 강화하며, 부농은 제한하고 고립시키는 계급정책을 실시했다. 초기 경험적 단계에서 고농(雇農)과 빈농 출신, 피살자가족, 전사자가족, 열성농민들을 주축으로 협동조합을 조직해 농업협동화를 선도한 것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당시 전체 농민 가운데 빈농이 약 40%를 차지하고 있었고, 부농은 0.6%에 불과했다. 중농이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광복 이후 토지개혁의 혜택을 입은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농업협동화에 우호적이었다. 일부 중농은 동요하거나 주저했고, 부농은 외면하거나 저항했지만 대세를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농업협동화는 시작과 함께 일사천리로 진행돼 다소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4∼5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완료됐다. 김일성이 『아주 짧은 기간에 아무런 풍파도 없이 아주 순조롭게 농업협동화를 완성했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동구권 국가의 경우 불가리아 1948∼58, 체코 1949∼60년, 루마니아 1949∼62년, 헝가리 1950∼61년, 동독 1952∼61년에 걸쳐 이루어진 사실에 비추어보면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런 풍파 없이 순조롭게 완성됐다는 주장에는 어폐가 있다. 경제적 토대가 미약하고 경험과 자금이 부족한데서 오는 애로와 난관은 처음부터 예상됐던 문제였다. 오히려 전쟁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농업협동화를 추진하는데 대한 노동당 내부의 이견과 반발이 더 골치였다.

김일성은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돼 농민들이 서로 힘을 합치지 않고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어차피 협동화를 실시하려면 부농과 중농이 거의 파산된 이 즈음이 적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연안파·소련파 등 당 일각에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관계에서 전자의 발전이 후자를 규정한다는 고전적 이론과, 소련·동구의 사례를 들어 「시기상조론」·「속도조절론」 등으로 맞섰다.

정책방침을 둘러싼 당지도부의 내홍과 갈등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털어놓고 말하여 우리나라에서는 협동화시기에 사대주의자들이 말썽을 부렸지 부르주아들이 분주탕을 피운 것은 없다』고 한 김일성의 발언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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