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타계한 이대용 공사는 '마지막 주월(駐越) 공사'였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이 점령당할 때 사이공에 남아 우리 교민들의 철수를 책임지고 기밀 서류를 파기하느라 피난 헬리콥터를 놓쳤다. 체포된 그는 5년이나 감금되었다. 북한 요원과 베트남 신문관의 회유를 수없이 받았다. "평양으로 간다면 당장 풀어주겠소. 당신을 귀빈으로 환대할 것이오"라고 유혹했지만 당당히 물리쳤다. 그는 진짜 군인이고, 대한민국에 충성을 바친 바른 공무원이었다.

나는 만년에 공사님을 자주 뵈었다. 순댓국을 좋아하셨다. 을지로 순댓국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소년처럼 웃으셨다. "6·25 나던 날 비가 왔어요. 장화 신고 도서관에 가려고 나섰지요. 프랑스 소설 〈프랑스 전선〉과 〈프랑스는 패했다〉에 빠져 있었지요. 당번병이 달려와 전쟁 났다길래 허허, 장화를 신은 채 부대로 달려갔어요." 그의 6사단은 춘천 전투의 선봉에 섰다. 6·25 전사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의 하나다. "우리가 압록강까지 제일 먼저 올라갔지요. 내 당번병이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아 이승만 대통령께 올렸어요. 참 꿈 같은 일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석방시키려 애썼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아 최규하 대통령 때에야 풀려났다. 78kg이던 체중이 42kg으로 줄어든 그의 손을 잡고 최 대통령은 금일봉을 건넸다. 나는 짓궂게 여쭈었다. "얼마였는데요?" 공사님은 녹두전을 드시며 말씀하셨다. "500만원, 뭐 외교관 하시던 분이니까."

베트남에서 큰 사업을 벌이던 기업을 곤경에서 구해준 일도 있다고 했다. 세관 문제인데 티우 대통령과 친한 덕이라고 했다. "옛날에 그 양반과 오키나와에서 함께 훈련받았거든요. 동기생인 셈이죠. 그래서 심심하면 대통령궁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점심도 했어요. 내가 선처를 부탁드렸더니 바로 해결해주시더군요. '아, 대한민국이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데'라면서." 내가 "나중에 그 기업이 고맙다고 하던가요?"라고 묻자 공사님은 "뭐 다 대한민국 일인데, 그런 일로 공을 따지겠어요"라고 하셨다.

"요즘은 무릎도 아프고, 집사람이 너무 늦게 다니지 말라고 잔소리를 좀 하지요. 그래도 집회가 있으면 주저 없이 나가요. 대한민국 살리자는 집회라면 사양하지 않습니다. 팔에 힘이 없어 깃발은 들 수 없고 다리가 약해 오래 걷지 못하지만 꼭 참석해서 앞자리에 앉습니다. 나라가 잘돼야 합니다." 공사님은 구순에도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걸으셨다. 언제나 환히 웃고 늘 겸손하셨다. 공사님, 편히 쉬십시오. 대한민국 잘 될 거예요.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23/201711230325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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