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찾는 동포에 총 쏘면… 독일, 東獨 黨서기부터 병사까지 단죄]

1989년 베를린 장벽 넘던 20代, 동독軍 총격 10발 맞고 숨지자
독일, 통일 후에 책임자 징벌

- 獨, 동독의 28년간 회의록까지 조사
최고 권력자들의 발포명령 확인, 책임자들에 5~7년 징역형 선고
크리스 사살한 동독軍 병사들이 "복무규정 따른 것" 항변했지만
獨 "37m서 정조준 하다니…" 처벌

- 獨, 통일 훨씬 전부터 처벌 준비
접경지대에 기록보존소 설립, 동독 정권의 인권침해 자료 모아
전문가들 "한국도 꼼꼼히 기록해 '먼 훗날에라도 처벌' 메시지 보내야"
 

크리스 게프로이

대한민국으로 오려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북한군 총을 맞은 귀순병 상태가 여전히 위중한 가운데, 우리 정부가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기록을 남겨 통일 후 관련자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려다가 동독 국경수비대의 총격으로 사망한 최후의 귀순 시도 동독인 크리스 게프로이(Chris Gueffroy·사진)의 사례도 재조명되고 있다.

동독 청년 크리스 게프로이는 1989년 2월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국경수비대의 총 10발을 맞고 숨졌다. 1990년 10월 통일이 이뤄진 뒤 독일 사법부는 이 사건을 수사해 실제 총격을 가한 국경수비대 말단 대원들부터 발포 명령을 내린 동독 최고 권력자까지 모든 책임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웠다.

독일은 이처럼 자유를 찾아가는 동포의 등 뒤에서 총을 쏜 이들을 통일 후에도 용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통일 훨씬 전부터 그들을 처벌할 준비를 했다. 1961년 8월 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을 세우고 주변에 지뢰를 매설한 뒤 서독으로 가려는 동독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3개월 뒤 서독 정부는 접경지대에 있는 잘츠기터(Salz gitter)에 중앙기록보존소를 만들었다. 동독 정권의 인권 침해 기록을 모아 통일 후 처벌할 근거를 마련해 놓기 위해서였다.

독일 통일 후 망명을 시도하는 동포를 향해 발포하거나, 발포·지뢰 매설 명령에 관여한 혐의로 246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132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독일 분단의 마지막 희생자'로 불리는 크리스 게프로이가 1989년 2월 초 친구 한 명과 함께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국경수비대의 총을 맞고 숨졌을 때, 그는 만 20세였다. 크리스는 대학에 가서 배우나 조종사가 되길 꿈꿨지만, 당국의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해 레스토랑의 견습 웨이터로 일했다. 1989년 1월 '인민군에 징집됐으니 5월에 입대하라'는 통보를 받고, 크리스는 자유가 없는 동독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2003년 6월 독일 베를린 브리츠지구의 운하 곁에서 크리스 게프로이를 위한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을 때 크리스의 모친 카린 게프로이가 기념비 옆에 앉아 아들을 추모하고 있다. 1989년 2월 동베를린에 살고 있던 만 20세의 청년 크리스 게프로이는 친구와 함께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려다가 동독 국경수비대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그는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국경수비대의 발포로 숨진 마지막 동독인이었고, 독일 정부는 통일 후에도 관련자들은 찾아내 처벌했다.
2003년 6월 독일 베를린 브리츠지구의 운하 곁에서 크리스 게프로이를 위한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을 때 크리스의 모친 카린 게프로이가 기념비 옆에 앉아 아들을 추모하고 있다. 1989년 2월 동베를린에 살고 있던 만 20세의 청년 크리스 게프로이는 친구와 함께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려다가 동독 국경수비대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그는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국경수비대의 발포로 숨진 마지막 동독인이었고, 독일 정부는 통일 후에도 관련자들은 찾아내 처벌했다. /게티 이미지 코리아

하지만 당시 동독 국경수비대에는 발포해서라도 탈주자를 막으라는 '스탠딩 오더(standing order·취소 때까지 유효한 명령)'가 내려져 있었다. 크리스는 심장에 총상을 입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친구는 목숨을 건졌지만 탈출 시도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9개월 전의 일이었다.

크리스의 모친 카린 게프로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 후인 1990년 1월 가해자들을 고소했다. 통일 후 독일 정부는 각 주(州) 검찰청에 특별수사부를 설치해서 동독 정권의 납치, 살해, 고문 등 인권 유린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크리스에게 총격을 가했던 전직 국경수비대원들도 1991년 9월 기소됐다. 이들은 "동독의 국경법과 국경수비대 복무규정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1992년 1월 재판부는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넘었을 뿐인 동료 시민의 상체를 37m라는 짧은 거리에서 조준 사격해서 즉사하게 한 것은 중형을 선고할 수 있는 '처형'이나 다름없다"며 "인권의 핵심을 침해한 것"이라고 유죄판결을 내렸다. 37m 뒤에서 크리스의 상체를 조준 사격한 대원은 징역 3년 6개월, 100m 밖에서 연발 사격한 대원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 발포 명령을 내린 권력자들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특별수사부는 동독의 일당 독재 집권 세력이었던 사회주의통일당 국방위원회와 정치국이 베를린 장벽 건설 후 28년간 열었던 회의 기록을 샅샅이 뒤졌다. 1962년 9월 14일 자 국방위 회의 문서에서는 동독 총리였던 빌리 슈토프, 당 중앙위원회 안보 담당 서기였던 에리히 호네커, 국가안전부 장관 에리히 밀케가 "국경 침범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되며 필요한 경우에는 제거돼야 한다"고 동의한 사실이 드러났다. 1971년 당 서기장으로 선출돼 동독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호네커가 1974년 5월 3일 회의에서 "국경이 침범당할 경우 가차없이 총포를 사용해야 한다"며 "성공적으로 탈주자를 저지한 수비대원은 치하해야 한다"는 제안을 한 사실도 밝혀졌다.

호네커, 밀케, 슈토프 등 전직 고위 권력자 셋은 1961~1989년 일어난 망명 시도자 사망 68건과 관련된 살인 교사 혐의로 1992년 5월 기소됐다. 동독 국방부 장관을 지낸 하인츠 케슬러, 동독 인민군 총사령관 프리츠 슈트렐리츠 등도 각 34건과 26건의 살인 교사 혐의로 기소됐다. 동독 정치국이 1971년과 1973년에 지뢰 설치를 통해 국경 방어를 강화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 당 서기장이었던 에곤 크렌츠를 비롯한 정치국 위원들도 기소됐다. 호네커처럼 선고 전에 병·고령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었지만, 다른 책임자들은 5~7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소급 처벌"이자 "승자의 정의"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독일연방대법원은 '총·지뢰 등을 동원해 고의적으로 살해한 정권의 행위는 심각한 인권 침해 행위이므로 실정법보다 자연법을 우위에 두는 국제 인권법 적용이 정당하다'며 이런 주장을 기각했다. 특히 동독이 1974년 가입한 국제인권규약에 '국외 이전의 자유'가 보장돼 있었다고 지적하며, 이런 기본권의 행사를 총기로 저지한 동독 국경법은 '불법적 법률'에 해당해서 살인죄를 정당화할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후 유럽인권재판소도 국경 정책으로 최고의 권리인 생명권을 침해할 수 없고, 인권침해범죄에는 시효가 없다고 판단했다.

통일 독일의 특별 경찰 기구로 설치된 '정권·통일 범죄 중앙 수사본부'는 동·서독 국경 지대에서 지뢰 및 총기 발포로 584명이 숨졌고, 그중 369명은 정조준 사격으로 사살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베를린 장벽에서만 126명이 사망했다. 우리 정부도 2014~2016년 통일 준비 정책의 일환으로 이런 사실을 연구해 대법원의 '통일 사법정책 연구', 통일부의 '과거 청산 분야 관련 문서' 등의 책자를 발간한 바 있다.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정보센터 부설 북한인권기록보존소의 윤여상 소장은 "정부는 JSA 귀순병 사건 등을 꼼꼼히 기록해서 책임자들에게 '먼 훗날에라도 처벌받을 것'이란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17/201711170038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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