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전 駐베트남 공사
교민 구출 후 5년간 포로로 고초… 6·25 첫 승전 '춘천전투' 이끌어
 

이대용 예비역 육군 준장
/성형주 기자

'마지막 주월(駐越) 공사' 이대용(92·사진) 예비역 육군 준장이 지난 14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1975년 4월 30일 월남(남베트남)이 패망할 당시 현지 한국 대사관 공사였던 그는 미국 측의 탈출 제의를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160여명의 교민 구출 작전을 완수했다. 월남 패망 이틀 전 대사관이 폐쇄됐으나, 탈출 못 한 잔류 교민들을 데리고 프랑스 정부에서 운영하는 병원(치외법권 지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월맹(북베트남)군에 잡혀 5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

이 전 공사는 사형수로 수감돼 고초를 겪으며 78㎏이던 체중이 42㎏까지 줄었다. 북한 공작 요원이 파견돼 직접 심문을 하고 '북한 망명 자술서'를 강요하는 등 그를 북으로 데려가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귀순 회유가 이어졌으나 끝까지 버텨냈다.

이 전 공사가 1980년 4월 12일 석방돼 귀국하자 최규하 당시 대통령은 "교민을 최후까지 지켜냈고 감옥에서도 지조를 지킨 영웅"이라고 치하했다고 한다. 포로 시절 자신을 혹독하게 심문한 즈엉 징 톡이 평양 주재 베트남 대사를 한 뒤 2002년 주한 베트남 대사로 부임하자 이 전 공사는 그와 화해했다. 그 뒤로 친구처럼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됐다. 즈엉 전 대사는 이 전 공사에게 "심문받던 당시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고 말하던 장군님의 선견지명에 놀랐다"며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황해도 금천 출신인 이 전 공사는 광복 후 고향의 인민학교(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김구와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가르쳤다는 이유로 '반동'으로 몰렸다. 그는 고향에 아버지를 두고 월남해야 했다. 육군사관학교 7기 졸업생인 이 전 공사는 1950년 6·25전쟁 당시 6사단 7연대 소속 1중대장으로 참전, 한국군의 첫 승전으로 기록된 '춘천 전투'를 이끌었다. 6사단 7연대 1중대는 그해 10월 26일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착해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은 부대다.

이 전 공사는 1960년 미 육 군참모대를 졸업했고, 1963년부터 4년간 남베트남에서 한국 대사관 무관을 지내며 베트남과 인연을 맺었다. 공직을 마친 뒤엔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 한국생명보험협회장, 육사 총동창회장 등을 지냈다. 2006년엔 '자랑스러운 육사인상'을 받았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발인은 17일 오전 8시 30분,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02)2258-5940.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16/20171116002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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