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불길 키우는 '적폐 청산'
文 대통령이 과거 비판했던 '마녀사냥' '모욕 주기'와 과연 다르게 진행되고 있나
코드 司正 유혹 털어내야 진정한 적폐 청산 될 수 있어
 

권대열 정치부장
권대열 정치부장
현 집권 세력은 이른바 적폐 청산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월 야당 대표들에게 "적폐 청산은 개인에 대한 책임 처벌이 아니다. 불공정 특권 구조 자체를 바꾸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뒤 굴러가는 모양새는 과거 '코드 사정'과 다르지 않다. 잘못이 있다면 처벌은 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과 문책 수준도 정당하고 상응해야 한다. 그래야 보복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청산이라 생각한다. 문 대통령이 이런 일에 대해 피력했던 소신에 비춰볼 때 더 그렇다.

지난 주말 김관진 전 청와대 안보실장이 구속됐다. 국방장관 재직 당시 '북한이 가장 무서워하는 군인'이라고 했던 인물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애초에는 그를 임명하기 주저했을 정도로 꼬장꼬장한 성격이다. 후배들의 신망도 얻었던 군인이다. 이번에 그의 명예는 짓밟혔다. 무슨 TF, 여당 의원, 정체불명 관계자 같은 이른바 '빨대' 등을 통한 각종 미확인 혐의가 쏟아졌다. 검찰은 그가 '파렴치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재진에게 밀리고 당겨지며 '모욕'당하게 하고 최소한의 인권마저 지켜주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군 사이버사의 정치개입 온라인 여론조작 활동을 지시하고 이에 관여한 혐의(군형법상 정치관여 및 직권남용)로 구속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구속 뒤 첫 조사를 받기 위해 1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호송차에서 내려 조사실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이런 식의 사정에 거부감이 컸다. 확인해보려고 그의 정치 초심이 담긴 자서전 '운명'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 봤다. '빨대' '모욕' '파렴치범' 같은 말이 거기서 등장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측근들이 대선 불법 자금 등으로 처벌될 때 얘기를 이렇게 썼다. '검찰의 소환 과정은 정말 문제였다. 안희정씨의 경우 거의 한 달 가까이 공개적으로 망신을 줬다. … 희대의 파렴치범이 검찰 청사에 등장이라도 한 듯, 수많은 기자가 밀고 당기고 붙잡으며 그를 누추하고 끔찍한 지경의 처지로 만들었다. 인격은커녕 인권도 없었다.' 그러면서 '수사 중인 피의자는 아직 무죄이다. 국민의 알 권리나 언론의 취재 활동 자유라는 말로 인권유린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했다. 김 전 실장 등 지금 적폐 청산 포토라인에 서는 수많은 인사도 그렇게 되고 있다. 문 대통령은 과거 노 전 대통령 수사에 대해선 '여론 재판과 마녀사냥이었다'며 '중수부장 이하 검사들도 언론에 수사 상황을 모두 흘렸다. 심지어 검찰 관계자라는 이름의 속칭 빨대가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보탰다'고 했다. 지금 이명박 전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도 그와 별다르지 않다.

'인권 변호사 문재인'의 지적은 단순히 수사 대상이 동지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사법 절차적 정의가 지켜지지 않은 데 대한 분노가 아니었나. 적폐 청산이 문 대통령 본인도 "그러면 안 된다"고 했던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누가 그걸 정치 보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나.

여권(與圈)에서는 "지금은 코드 사정이나 정치 보복이 아니다"라며 "정권 하명(下命)이 아닌 촛불과 국민 뜻에 따른 것"이라고도 한다. 과연 그런가. 이 모든 수사에 땔감을 제공하고 있는 19부처의 적폐 청산 TF는 청와대 지시로 만들어졌다(청와대는 '지시'가 아닌 '협조 요청'이었다고 하지만). 그곳에는 야권(野圈) 추천 인사가 한 명도 없다. 정권 눈치 보는 공무원들과 지난 정권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청와대가 조사에 손을 대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임 없이 마구 칼을 휘두를 세력에게 '헌법과 법률에 없는 초과권력'을 쥐여준 것이다. 정당한 방식이 아니다. 반대 세력이 "인민재판"이라고 비난할 소지를 준 것이다('초과권력'도 문 대통령이 썼던 용어다).

왜 이번 사정이 문 대통령이 품고 있던 초심(初心)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돼가고 있는 걸까. 책의 한 구절이 마음에 걸렸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청와대 때) 사정 비서관에는 대통령이나 나와 인연이 없는 사람을 일부러 골라서 썼다'면서 '이에 대해 인수위 안에서 강한 반발이 있었다. 그 중요한 자리에 왜 우리 쪽 사람을 안 쓰느냐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요즘 와서 생각하면 그 말이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정에도 코드가 필요하다는 생각, 그것이 현실적인지도 모르겠다'고 썼다.

문 대통령은 당 시에는 '사정에 코드가 작용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관철했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책을 쓸 때(2011년)는 본인의 이런 소신을 실행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할 수 있다. 세상을 바꿀 기회다. '코드 사정'의 유혹을 털고 본인이 말했던 원칙대로 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적폐 청산이 될 수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13/20171113030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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