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적응 힘겨운 국군포로들]

정착지원금 등 3억~5억 받지만 돈 문제로 가족과 갈등 '외톨이'
"미국의 '참전 용사촌'처럼 노병들 함께 지낼 커뮤니티 필요"
 

1994년 고(故) 조창호씨가 국군 포로 출신으로 처음 탈북한 후 80명이 사선(死線)을 넘어 한국 땅을 밟았다. 탈북자 지원 단체 '물망초재단' 등에 따르면 이 중 33명이 생존해 있다. 새로 가정을 꾸려 잘 지내는 경우도 있지만, 남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6·25전쟁 국군포로
김성태(85)씨는 6·25 때 7사단에 배속돼 싸우다가 전쟁 발발 사흘 만에 경기도 양주에서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다. 지금도 복부 아랫부분과 발목에 120㎜ 박격포탄 파편이 스쳐간 상처 자국이 선명하다. 김씨는 65세 때까지 약 40년을 함경도 회령과 온성의 탄광에서 일했다. 2001년 아들과 함께 탈북했다.

김씨는 지난 2014년 '한필수 사기 사건' 때 전 재산 2억5000만원을 뜯겼다. 한필수 한성무역 대표는 당시 탈북자들을 상대로 "시중 은행보다 높은 연 18%의 이자를 제공하겠다"고 꼬드겨 약 160억원을 뜯어냈다. 피해자 100여명 중 상당수가 국군 포로였다. 금융 등 자본주의에 사실상 '까막눈'인 이들이 한씨의 사기 행각에 속아 넘어갔다.

김씨는 현재 남양주의 10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산다. 달마다 받는 연금은 대부분 중병(重病)을 앓고 있는 아내의 치료비에 쓰고 있다. 주위의 만류에도 얼마 전까지 세차 일을 했다.

2000년에 한국 땅을 밟은 한 국군 포로 출신 탈북자(90)는 전라남도 무안의 쪽방촌에서 홀로 살고 있다. 지금도 폐지를 줍거나 시청·구청의 공공 근로를 통해 도로 청소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국가로부터 받은 지원금은 대부분 탈북 브로커 비용과 북한에 있는 가족의 생활비에 사용했다. 안타까운 사정을 접한 물망초재단에서 매달 소액의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국군 포로가 탈북해 한국에 오면 정착 지원금과 함께 그동안 받지 못한 월급 등을 포함해 약 3억~5억원을 받는다. 전역 계급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150만원 정도의 군인연금도 매달 나온다. 2006년 '국군 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 귀환 용사에 대한 재정 지원은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돈을 노린 가족·친지와 갈등을 빚거나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국군 포로 출신 이모(95)씨는 2005년 나이 80이 넘어서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전쟁통에 헤어졌던 아내와 61년 만에 재회해 10년을 같이 살았다. 하지만 재작년 아내가 세상을 뜨자 일흔이 넘은 외아들은 "아버지가 해준 것이 뭐가 있냐"며 돈을 요구했다. 아들과 벌인 다툼에 이씨가 몸에 찰과상을 입는 일도 있었다. 6·25 때 입은 상처로 이씨의 오른발은 왼발보다 5㎝ 짧다. 거동이 불편한 이씨는 경기도 의정부의 한 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다. 찾아갈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다.

국군 포로들이 여생(餘生)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커뮤니티 조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미국의 경우 곳곳에 미군의 지원을 받는 '참전 용사촌(Patriot Village)'이 세워져 있어 고령의 전쟁 포로 출신들이 함께 살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의료 시설뿐만 아니라 골프장 과 볼링장, 피트니스센터 등도 갖춰진 종합 커뮤니티다.

박선영 물망초재단 이사장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이들을 제대로 대우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라며 "국군 포로 출신 탈북자들에게 군부대·정부·지자체 강연 기회를 많이 제공하면 안보 교육도 되고 어르신들 자존감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9/20170929001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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