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한 뉴욕특파원
김덕한 뉴욕특파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에 대한 아홉 번째 제재 결의를 통과시킨 11일(현지 시각) 한 미국 기자가 다가와 "섭섭하냐"고 물었다. 미국 측의 당초 안에서 크게 후퇴한 제재안에 대해 한국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했다. "김정은·김여정 남매 제재나 북한에 대한 원유 수출 금지가 관철됐다면 제재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답하자, 그는 "그게 진짜 될 거라고 기대했느냐"며 웃었다. 유엔을 20년 넘게 출입한 그 노(老) 기자는 "미·중·러가 자국의 이익을 걸고 맞부딪치는 안보리에서 이 정도 제재가 합의된 것만 해도 큰 진전"이라며 "유엔에서 '정의'라는 말이 퇴색된 지 오래"라고 했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강행한 후 미국이 제시했던 초안대로 북한에 원유를 진짜 끊는다면 북한은 마비될 것이고 김정은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면 세계 어디에서도 옴짝달싹 못 할 것이다. '끝장 제재'가 될 것처럼 보였던 안보리 결의 2375호가 통과된 지금 그런 기대를 했다면 참 순진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미국 정부조차도 안보리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정황에서 확인된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미국 정부 관리의 말을 인용, "트럼프 행정부는 사실 안보리의 새 대북 제재 결의에 별 기대를 걸지 않고 있다"며 "미국 정부는 군사적 압박,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은행 제재 등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정부조차 중국과의 충돌을 감내하면서 중국 기업들을 직접 독자 제재하지 않는 한 안보리 제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11일(현지시각) 북한으로의 유류공급을 30% 가량 차단하고 북한산 섬유제품 수입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새 대북제재 결의 2375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사진은 이날 안보리 전체회의 표결 모습. /AP 연합뉴스
'유엔의 선의(善意)'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안보리는 거부권을 가진 5개 상임이사국이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담합'하는 정치판으로 변해 버렸다. 유엔 안보리가 더 이상 국제사회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사례는 많다. 2011년부터 시리아에서는 독재자 알아사드 정권과 반군 간 내전으로 끔찍한 재앙이 계속됐지만 안보리는 러시아의 반대에 막혀 그 흔한 규탄 결의 한 번 채택하지 못했다. 그 사이 시리아에선 33만명이 죽었다.

안보리에서 논의되는 북핵 문제, 한반도 문제 역시 결국 미·중·러의 핵심 이익이 침해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합의가 이뤄진다. 중·러는 지금껏 북한이 붕괴 위기에 처할 만한 어떤 제재에도 동의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국제사회가 정말 '제재를 통한 북핵 해결'을 할 의지가 강력했다면 진작에 중국의 대북 송유관을 막아버렸 을 것이다.

한반도의 명운이 좌우될 결정적 순간에 우리가 바라볼 곳은 안보리가 아니다. 6·25 때 연합군을 보내줬던 유엔은 이제 없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우리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동맹이다. '국제사회' '인류 보편의 가치' 같은 추상적이고 멋있어 보이는 말에 안보를 의탁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 버려야 한다는 것을 지금의 안보리가 보여주고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13/20170913033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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