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북의 6차 핵실험을 계기로 안보 정책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권과 지지층 내에서 금기시되던 조치들까지 받아들이고 있다. 일시적인 것인지, 근본적 전환인지 좀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래도 취임 후 거의 처음으로 국가 안보 수호자와 군 통수권자의 면모를 느끼게 한다.

문 대통령은 4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역대 최고 수준의 제재'를 언급하면서 북에 대한 원유 공급 중단과 북한 해외노동자 송출 금지를 유엔 안보리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에너지와 외화 공급을 끊자는 얘기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북 내부를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이 두 가지를 거부해온 나라다. 문 대통령이 이것을 푸틴 대통령에게 말했다. 이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각하기 어려웠던 변화다. 청와대와 민주당엔 그동안 원유 공급 중단에 대해 부정적 기류가 있었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국군 미사일의 탄두 중량(重量) 제한을 없애기로 합의한 것도 큰 진전이다. 북핵 위기가 최고조에 오른 탓이 있다고 해도 역대 대통령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다. '한·미 미사일지침'은 명문화된 협정이 아니면서도 38년 동안 대북(對北) 미사일 능력에 족쇄로 작용해왔다. 이명박 대통령이 사거리 제한을 늘렸고 이번에 문 대통령이 족쇄 자체를 없앴다. 우리 군이 2~5t 열압력 탄두의 탄도미사일을 전력화하면 북 지휘부는 땅속에 숨어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이 사실은 북 정권에 대한 상당한 억제력으로 작용한다.

송영무 국방장관은 4일 국회에서 자유한국당의 당론이고 바른정당도 조건부 찬성 입장인 전술핵 재배치 문제에 대해 "그것을 포함한 대안을 검토해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했다. 전술핵 재배치는 한·미가 합의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핵 대 핵'의 균형 회복을 추진한다는 것 자체가 북에 대한 메시지가 된다. 물론 청와대와 민주당은 여전히 반대 입장이다. 그렇다고 해도 새 정부의 국방부가 이런 방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변화다. 문 대통령이 국방장관의 전술핵 재배치 건의를 받는 것 자체가 전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송 장관은 이날 김정은을 포함한 북 전쟁지휘부를 제거할 '참수(斬首)부대'를 12월 1일 출범시키겠다고 했다. 송 장관이 의도적으로 날짜까지 밝혔다. 참수부대를 미국 특수작전 부대 수준으로 키우면 이 역시 강력한 대북 억지력이 될 수 있다.

이제 북 핵·미사일은 최악 최후의 순간에 도달했다. 미국이 마련 중인 새로운 제재안에는 중·러의 원유 공급을 막는 내용이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반대 입장을 밝혔고 러시아도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 포함되더라도 또 여러 조건이 달린 제한적인 내용이 될 수 있다. 미국이 북과 거래하는 모든 나라와 기업을 제재(세컨더리 보이콧)하는 문제도 검토 중이라 하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새로운 제재로 북을 당장 굴복시킨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북이 새로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나설 가능성이 더 높다.

이제 머지않은 시기에 한·미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문 대통령도 햇볕론자였다. 지금도 그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국제관계, 특히 대북관계가 선의(善意)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는 확인했을 것이다. 김정은은 문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은 물론 군사·적십자회담 제안, '한반도 운전자론'을 모두 조롱했다. 대통령이 북의 선의에 대한 희망적 사고를 버리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국가 수호의 결연한 의지로 나서는 것이 북핵 해결의 첫걸음이다. 특히 진보 진영 대통령의 이런 의지는 김정은에게 강력한 경고가 된다. 그러면 국론도 차츰 모아질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05/20170905031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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