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북 핵실험 날, '한국의 유화책' 탓한 것은
文 정부의 잇단 엇박자에 불만 터뜨린 것
한·미 불협화음 계속되면 안보 위기 넘지 못한다
 

박두식 부국장
박두식 부국장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에 북한의 6차 핵실험에 대한 입장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미국 동부 시각으로 지난 3일 오전 8시 30분부터다. 한국 시각 3일 밤 9시 30분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는 9분, 7분 간격으로 이어졌다. '내가 한국에 말했듯, 한국은 북한에 대한 유화적 발언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가고 있다'고 밝힌 트위터는 한국 시각으로 9시 46분에 나왔다. 여기서 트럼프는 공식 외교 무대에선 좀처럼 쓰지 않는 '어피즈먼트(appeasement·유화책)'라는 말로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을 비판했다.

외교사(史)에서 어피즈먼트의 동의어처럼 등장하는 인물이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전(前) 총리다. 그는 '히틀러의 독일'에 타협·양보·협상으로 일관하다 2차 대전의 참화를 부른 인물로 기록돼 있다. 이런 부정적 배경 때문에 외교에서 기피어(語)가 된 것이 유화정책이다. 언론과 정치권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대북 유화책'이라고 비판해도 한·미 정상 간 대화나 공식 외교 채널에서 이 말이 등장한 적은 없었다.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2000년대 초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은 대화가 가능한 합리적 인물'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자 '그런 리더가 왜 국민을 굶주리게 하고 탄압하느냐'는 조크로 받아넘긴 일은 있었지만 대놓고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을 유화정책이라고 못박은 것은 처음 같다"고 했다. 그는 "한국 정부에 '공개 모욕'을 준 것인데 그간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에게 느껴온 답답함을 드러낸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미·일이 '군사적 옵션'을 거론하면서 대북 압박을 높여갈 때 문 대통령이 '전쟁만은 안 된다'는 등의 발언으로 엇박자를 놓은 것이 북핵 사태를 키웠다는 트럼프의 불만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트위터 캡처
미국 언론들도 이 발언을 계기로 일제히 한·미 동맹의 이상 기류를 대서특필했다. '트럼프는 왜 북 핵실험 후 한국을 가장 강하게 비난했는가'(뉴욕타임스), '북한이 핵 근육을 과시했는데 미국은 한국과 싸우기를 택했다'(월스트리트저널), '트럼프가 서울을 꾸짖다(scold)'(워싱턴포스트) 같은 기사가 줄을 이었다.

반면 아베 일본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요즘 말로 '브로맨스(bromance·남성 간의 애틋한 관계)'에 가까운 우의를 과시하고 있다. 북이 미사일을 쏘거나 핵실험을 했을 때 트럼프가 가장 먼저 찾는 동북아의 동맹국은 일본이다. 북이 6차 핵실험을 한 당일만 해도 두 정상은 두 차례 전화 회담을 가졌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와 통화한 것은 북 핵실험으로부터 하루(정확히는 34시간 16분)가 지난 뒤였다. 앞선 다섯 차례 북 핵실험 때는 당일 또는 24시간 이내에 한·미 정상 간 전화 회담이 이뤄졌다.

청와대는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한 횟수나 시기를 놓고 일본과 비교하는 언론 보도에 상당히 짜증이 난 눈치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런 보도 자체를 '과거에 사로잡힌 발상'이라고 했다. 트럼프와 언제, 몇 번 통화했느냐가 동맹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런 청와대의 항변이 한·미 정상 사이의 불협화음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다.

북이 지난달 29일 중거리급 탄도미사일(IRBM)을 쐈을 때도 트럼프 대통령은 당일과 다음 날 연거푸 아베 총리와 통화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당시 북 미사일은 500여㎞ 고도에서 일본 홋카이도 상공을 통과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그러나 서울로부터 불과 60여㎞ 떨어진 곳에 있는 북의 장사정포 1300여 문이 대한민국의 심장부를 겨냥하고 있다. 북의 핵·미사일 위협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돼 있는 것도 대한민국이다. 그런데도 한·미 정상 간 전화 회담은 북이 미사일을 쏜 지 사흘 뒤에나 이뤄졌다. 그 통화로부터 이틀 뒤 북이 여섯 번째 핵실험을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한국의 대북 접근을 '유화책'이라고 맹비난했다. 이것이 지금 한·미 동맹의 실상이다.

요즘 한국 외교관들에게 아베 총리는 얄미우면서도 부러운 존재다. 전 세계가 쩔쩔매는 트럼프 대통령을 솜씨 있게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취임 직후 그간 미국이 일본과 함께 추진해 온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를 파기하는 것으로 아베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런 위기를 딛고 반년여 만에 최상의 동맹 관계를 다시 만들어낸 게 아베 총리다. 일본의 저력이고 아베의 리더십이다.

북의 핵·미사일 위협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손쉬운 해법은 없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북핵 위기는 진작에 마무리됐을 것이다. 북한 위협의 궁극적 해결이라는 긴 여정의 출발은 한반도 주변 강국들이 같은 목적을 갖고 함께 움직여 나가도록 만드는 외교의 복원에서 시작돼야 한다. 미국의 홀대, 중국의 구박, 일본과 갈등을 자초하는 외교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외교·안보 진용과 구상, 전략을 새로 짜야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05/20170905032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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