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 문화부 차장
유석재 문화부 차장

편집국 맞은편에 앉은 동료 기자의 얼굴에 최근 며칠 새 황당함과 허탈함이 교차했다. 그는 지난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북한의 '협박'을 받았다. 그들은 실명까지 거론하며 "공화국 형법에 따라 극형에 처한다는 것을 선고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3주 전에 번역 출간된 책 한 권에 대한 보도가 빌미가 됐다. 전·현직 영국 기자 2명이 쓴 '조선자본주의 공화국'이었다. 이 책은 밀물처럼 북한으로 밀려들고 있는 '밑바닥 자본주의'의 실체를 증언과 취재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했다.

평양에선 새로운 바(bar)와 음식점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데, 라거 맥주와 에일을 현장에서 제조하는 소규모 양조 바도 몇 군데 있다. 장마당에서 8달러에 팔리는 MP3 플레이어엔 주로 한국 가요를 넣어 듣는다. 평양 시내 인기 아파트는 10만달러를 호가하고, 젊은 연인들은 돈을 조금 내고 빈 가정집을 빌려 사랑을 나눈다…. 다들 폐쇄 국가로만 알았던 북한에 '소비의 욕구'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최악의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꿈틀거리며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지난달 31일 북한이 '중앙재판소' 대변인 명의로 내놓은 '담화문'은 뜻밖이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이 책을 소개하는 기사를 지면에 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대해 "두 놈의 영국 기자 나부랭이들이 써낸 모략 도서 내용을 가지고 우리 공화국의 존엄을 엄중히 모독하는 특대형 범죄를 감행했다"며 기사를 쓴 기자들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절차 없이 (형을) 즉시 집행할 것"이라고 극언했다.
'조선자본주의공화국' 책 표지.

언어의 수준은 차치하고서라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국내 대부분 신문이 보도했는데 북한 측은 유독 특정 신문만 겨냥했다. 북한 국장(國章)을 변형했다고 펄펄 뛴 책 표지는 저자와 출판사가 정한 것이다. 북한 '중앙재판소'는 정작 책을 출판한 영국 출판사나 저자의 소속사인 로이터통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얼토당토않은 분노를 표출한 것도 문제이지만 화를 낼 대상도 번지수가 틀렸다.

북한은 과거 '김정일 물러나야'라는 사설을 문제 삼아 '조선일보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수차례 테러 위협을 가한 적이 있다. 이번 협박도 북한 정권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미사일과 핵실험으로 큰소리치지만 사실은 통제의 빈틈으로 물에 젖듯 조금씩 스며드는 한국과 서방의 문화와 시장경제 시스템이 결국 체제를 무 너뜨릴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얘기다.

영국인 저자들은 "북한을 움직이는 새로운 시스템은 아직 불공정한 적자생존 방식이지만, 적어도 평균적인 시민에게 자신이 삶의 주체라는 자의식과 스스로 생계를 이을 기회를 주고 있다"고 했다. 그런 '자의식'과 '기회'를 테러 협박으로 막을 수 있다고 믿는 수준으로는 머지않아 인민의 징벌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04/20170904027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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