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데 어느 재앙이 묻고 찾아오는가
정부가 할 일은 평화선언보다 전시에 따를 행동수칙 등 대응책과 실질적 정보 제공
대비는 평화가 주는 특혜니까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말은 종종 현실을 배반한다. 우리는 나이 든 어르신에게 '젊어 보이시네요'라고 덕담을 건네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에게 '영어를 잘한다'고 치켜세운다. 말을 걷어내고 현실을 보면 노인과 비영어권 사람이 보인다.

올해 광복절 경축사를 접한 언론들은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는 대통령의 말을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언론의 의제 설정은 한반도 평화에 방점이 있다. 그만큼 현실의 전쟁 위험이 커졌다는 뜻이다. 노래 '걱정 말아요 그대'가 회견장을 적신 취임 100일 기자회견장에서도 언론의 관심은 '레드 라인'에 가 있었다.

나라가 불안할 때 국민을 안심시키고 굳건한 평화 수호 의지를 천명하는 것은 지도자의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차분하고 겸손하게 소통하려는 대통령의 모습은 비록 연출된 것이라고 해도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럼에도 현실을 바라보면 전쟁 걱정을 덜어야 할 논리적인 이유를 찾기 어렵다. 대개 재난은 미리 예상하고 철저히 준비할 때 조금이라도 걱정을 덜 수 있다. 전쟁을 예상하지 말라니 더 걱정이다. '동의'를 구하고 발생하는 재난이나 재해가 지구상에 있었던가.

데모스테네스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이자 웅변가였다. 그가 한 '양치기와 늑대'의 비유는 유명하다. 그는 웅변가 9명을 넘겨주면 공격하지 않겠다는 적의 요구에 타협하려는 아테네 시민들을 이렇게 설득했다. "어느 날 늑대가 양치기에게 친구가 되자고 접근해 양치기가 동의했다. 늑대는 이제 양을 지키는 개가 필요 없을 테니 개를 넘겨달라고 했고 그 말을 믿은 양치기는 개를 포기했다. 그랬더니 늑대가 바로 공격해서 양들을 잡아먹었다. 이래도 전쟁을 피하려 개를 넘겨주겠는가?" 그의 말에 아테네의 시민들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전쟁에 임할 준비를 했다. 이 일화는 설득의 힘을 설명할 때 사용되지만,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는 서양의 오랜 경구도 함께 담고 있다. 손자의 병법도, 충무공 이순신도 적과 기꺼이 맞서야 승리를 이끌 수 있다고 가르쳤다.
1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문재인 대통령의 '전쟁' 관련 용어는 '냉전' '도전' '군사적 긴장' '군사행동' 등이다. 여기서 딱히 '적'을 읽어내기도 쉽지 않다. 북한에 대화를 촉구하며 그가 언급한 '동의'의 대상은 아마 미국이었을 것이다. 분단은 냉전의 산물이다. 어느 전쟁에서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신중하다 못해 모호하다. 분명한 건 전쟁의 장소가 한반도이고, 각종 외신의 시나리오대로라면 '48시간 안에 10만 명의 한·미 군인이 사망하고 90일 안에 민간인 포함 20만~30만 명이 희생될 수도 있는, 매우 '더럽고 잔인하고 짧은(nasty, brutish, and short)' 전쟁이 되리라는 예상이다.

겉으로는 둔감해 보여도 국민은 전쟁 시 행동 수칙에 관심이 많다. 생존은 본능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면 지하로 대피하라는데 출구가 막힌 아파트 지하는 위험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이가 있다. 미리 대피 장소를 알아두라는데, 그런 장소는 평소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가. 미래의 전선이 육·해·공을 넘어 우주와 가상공간으로 확장된 상황에서 내 중요 정보와 자산은 무사할까. 현금을 챙기라는데, 어떤 이는 금이 더 유용하다고 한다. 뭘 준비해야 생존에 유리할까. 국민은 둔감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부가 이런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이 불안을 덜어주는 첫 번째 길이다.

전쟁 기술과 무기가 진화할수록, 그에 대한 대비도 따라서 진화해야 한다. 과거 비행기 공습 시절의 경험으로 미래 전쟁을 대비할 수는 없다. 탱크가 국경을 넘는 시간에 맞춰 피란계획을 세우다 미사일을 맞으면 낭패다. 라디오를 챙기라는데, 스마트폰을 먼저 챙겨야 하는 건 아닐까. '중요 정보를 USB에 담아 두고, 가족끼리 이메일 주소를 교환하라'는 항간의 조언은 따를 만한 것인가. 영화 '인디아나 존스' 주인공처럼 냉장고 속에 피신하면 핵의 위협에서 안전할까. 미국 연방비상관리국(FEMA)이나 적십자사는 '생존가방' 챙기는 동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공유하고 있다. 스위스에는 핵 공격에 대비한 지하대피소가 있다고 한다. 그나마 우리나라 행정안전부의 '안전디딤돌' 앱이 '핵무기 공격 시 행동 요령'을 제시하고 있으나 폭염, 승강기 사고, 해파리 경보, 무더위 쉼터 같은 수 많은 평화 시 지침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

남북한 군사 균형, 한·미 공조, 비상시 훈련. 이 세 가지라도 갖춰지면 전쟁 걱정을 조금은 덜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어느 것 하나도 완벽하지 않다. 무엇보다 당장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음의 리허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전쟁에 대비하는 건 평화 시의 특권이다. '걱정 말아요'라는 노래로 될 일이 아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1/2017082102807.html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