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석조 국제부 기자
노석조 국제부 기자

1992년 11월 이스라엘 외교부와 대외 첩보부 모사드의 예루살렘 본부로 편지 한 통이 각각 배달됐다. 발신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평양으로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외교부는 서둘러 사절단을 꾸려 평양에 보냈다. 모사드도 따로 팀을 평양에 급파했다.

임무는 '협상을 통해 북한의 대(對)중동 무기 수출 중단시키기'였다. 북한은 리비아·이란·시리아 등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중동 국가에 탄도미사일 '노동 1호'를 포함해 무기를 많이 팔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은 미사일 방어(MD)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상태였다. 국경을 맞댄 시리아가 노동 1호 여러 발을 동시에 쏜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실제로 1991년 이라크로부터 미사일 공격을 받은 전례가 있었다.

비밀 해제된 이스라엘 외교 문서 등에 따르면, 북한은 평양에 도착한 이스라엘 사절단을 평안북도 운산 금광에 데려갔다. "운산 금광 개발에 10억달러를 투자해주시오. 그 대가는 있을 겁니다." 북한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개월 전 이미 북한과 가까운 미국의 유대인 사업가와 뉴욕 주재 북한 사업가를 통해 이스라엘의 처지가 어떤지 파악했기 때문이다.
시몬 페레스(가운데) 이스라엘 대통령이 1994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는 모습.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 협정을 이끌어 냈다. 양옆에 공동 수상자였던 야세르 아라파트(왼쪽)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서 있다. /위키피디아
'10억달러를 북에 주고 중동 무기 수출 중단을 약속받을 수 있다'는 협상 제안에 이스라엘은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미국이 제동을 걸었다. "북한은 협상할 만큼 신뢰가 가지 않는 나라"라고 조언했다. 그러자 북한은 "이스라엘은 주권도 없나" "미국에 복종하는 위성국가인가"라면서 둘 사이를 이간질했다. 이스라엘 내부도 의견이 갈렸다. 일부 외교부 실무자는 "북한이 무기 수출을 하는 건 결국 돈 때문이니 돈을 주면 멈출 것"이라며 "미국의 조언을 꼭 따를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모사드는 "북한과의 협상은 설사 타결되더라도 일시적이거나 눈속임용일 수 있다"고 이츠하크 라빈 당시 총리에게 보고했다. 고민 끝에 라빈은 1993년 8월 최종적으로 북한과 협상을 중단했다.

라빈은 제1 좌파 정당 '하 아보다' 소속의 대표적 비둘기파였다. 원수인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정을 맺고 그 공로로 199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전쟁을 치렀던 요르단과 화해하고 수교(修交)하며 안보 위험 요소를 크게 줄이는 성과도 거뒀다. 평화에 대한 신념을 지키다 1995년 11월 4일 극우 유대인 청년의 총에 암살됐다. 그런 라빈조차 믿고 대화할 대상이라고 보지 않은 나라가 북한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MD 개발에 박차를 가해 '노동 1호'가 날아와도 걱정 없는 '강철 지붕' 나라가 됐다.

북한 행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협상 테이블에 불러낸들 핵을 보유한 뒤 유리한 위치에서 테이블에 앉겠다는 그들이다. 라빈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그런 북한에 국민 목숨을 담보로 하는 '대화' 제의는 없었을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1/20170821028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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