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ICBM 도발 이후 美, 전쟁 직전 분위기… 의원 95% 대북 강경 입장
"韓 경제대국이지만 북핵으로 동북아 힘의 균형 무너져"
오판에 따른 파국 가장 두려워
 

강인선 워싱턴 지국장
강인선 워싱턴 지국장

요즘 워싱턴은 2003년 이라크 전쟁 직전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이라크'가 '북한'으로 바뀌고, '부시'가 '트럼프'로 바뀌었을 뿐 지금 이 도시에 울려 퍼지는 온갖 전쟁 시나리오는 14년 전 워싱턴에서 듣던 바로 그 소리이다.

미국 독립기념일인 지난 7월 4일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쏘아 올린 후 워싱턴엔 북한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한 백가쟁명의 시대가 열린 듯하다. 선제공격에서 김정은 정권 교체, 북핵 보유 인정까지 그동안 잘 드러내지 않던 미국인들의 속내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신문, 방송, 인터넷 할 것 없이 눈만 돌리면 북한과 김정은 뉴스가 넘쳐나서 이젠 미국 보통 사람들도 '김정은'을 정확하게 발음할 정도가 됐다.

북한을 미지근한 제재와 압박으로 다스리는 '만성질환'쯤으로 여기던 워싱턴의 태도가 급변한 것은 북한 ICBM 도발 이후다. 북한이 '미국 본토 공격 능력'을 증명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것을 '레드 라인'이라 부르든 '게임 체인저'라 부르든, 미국이 북핵 문제를 보는 시각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 진입했다.

'미국 본토 공격 가능성'이란 말을 듣는 순간 미국 사람들은 즉각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떠올린다. 소련과 핵전쟁 직전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돌파구를 찾은 쿠바 미사일 위기는 9·11 테러 이전 미국 본토가 위협받은 최악의 안보 위기였다. 당시 미국인들은 진짜 핵전쟁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핵탄두를 장착한 북한 ICBM이 미국 본토까지 날아올 수 있다는 것은 55년 전 핵미사일을 실은 소련 잠수함이 미국을 향해 다가오던 순간의 악몽을 정확하게 일깨운다. 북한 ICBM이 미국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임을 이 이상 잘 설명하기도 어렵다.

지난달 미 하원의원들의 한반도 문제 공부 모임에 가봤다. 8월 휴회를 앞두고 일정을 분 단위로 쪼개 쓰던 하원의원들이 10명도 넘게 참석했다. 회의 제목은 '한·미 관계의 미래'였으나 발언 내용은 북한에 집중됐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의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북핵 문제를 해결할 마땅한 방안이 없다"며 한숨을 쏟아냈다. 한 의원이 "북한이 민주·공화를 단합시켜 주고 있다"고 했다. 다들 웃었으나 농담이 아니었다. 미 의회에서 북한 핵·미사일 문제만큼 '초당적' 공감대가 이뤄지는 분야도 없다. 미 의원 중 90~ 95%가 대북 강경 입장일 정도로 이견이 없다고 한다. 최근에 만난 한 한반도 전문가는 "북한 ICBM이 워싱턴에 남은 마지막 온건파까지 날려버렸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북한 관련 발언은 혼란스럽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을 두고 보느니 전쟁하겠다"고 하면, 곧이어 틸러슨 국무장관이 "대화를 희망한다"고 한다. 그 다음 날엔 맥매스터 국가안보 보좌관이 "예방 전쟁 포함 모든 옵션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강온 양면 작전인지, 부처 간 조율 부족의 결과인지는 확실치 않다. 트럼프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 발언도 즉흥적인 것인지 사전에 준비된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이런 혼란은 트럼프 외교 정책이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 국무·국방 장관이 서로 의견을 조율해 대통령을 보좌하는 시스템으로 움직이지 못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날리는 몇 문장으로 워싱턴 분위기가 하루에도 몇번씩 바뀌는 판이니 참모들은 뒷수습에 정신이 없다.

외교안보팀이 충원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으로 꼽힌다. 국무부와 국방부에서 동아시아 문제를 다룰 차관보는 여전히 공석이다. 국무부 내 거의 모든 지역 담당 차관보 자리는 아직 주인을 찾지 못했다. 한 상원의원은 "요즘 국무부는 청산 직전의 기업 같다"고 했다. 한 국무부 관리가 "미국이 플랜A, 플랜 B, 이런 식으로 북핵 대책을 준비해두고 있는 게 아니다"고 털어놓은 일도 있다.

최근 한 세미나에서 북한 전문가가 "경제 대국 한국이 늘 북한보다 앞서간다고 생각했는데 ICBM 도발 이후엔 북한이 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워싱턴 사람들 눈엔 핵을 가진 북한이 체제 경쟁에서 한국을 밀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북한이 핵 능력을 갖게 되면서 6·25전쟁 이후 동북아와 한반도에서 가까스로 유지돼온 힘의 균형이 흔들리고 한국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워싱턴에 위기감이 한껏 고조돼 있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당장 전쟁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진 않다. 군사적인 방안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오판이나 어리석은 행동, 우연이나 광기로 상황이 꼬여 이 위기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은 그 가능성이 가장 두렵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6/20170816031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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