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철 스포츠부 차장
강호철 스포츠부 차장

"열심히, 꼬박꼬박 훈련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정말 단일팀이 되긴 되는 건가요? 위에서 하라 하면 우리는 그냥 따라야 하는 건가요?"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수들은 요즘 매일 오후 태릉선수촌 훈련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오후 5시에 시작한 훈련은 밤 9시 반쯤에야 끝난다. 지친 발걸음으로 귀가하면 곧바로 곯아떨어지기 일쑤다. A선수는 "아직 결정된 게 없어서인지 단일팀이란 게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며 "감독님이나 협회 분들이 일단 훈련에만 집중하라고 하시지만, 뭔가 마음 한구석이 붕 떠 있는 기분"이라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일팀 소식에 가장 민감한 것은 지금도 대표팀 최종 엔트리를 놓고 내부 경쟁 중인 선수들이다. 단일팀이 되면 누군가 빠져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단일팀 문제를 공개적으로 꺼내는 선수는 없다. 그래도 관련 기사가 뜨면 누군가는 꼭 선수들 단체 채팅방에 올린다. 마음고생 하는 선수들 손에 스틱이 제대로 잡힐 리 없다. 얼마 전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세계선수권대회에 나온 북한 애들 중 괜찮은 수비수가 한둘 있는 것 같던데?"라고 했다가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고 한다. 한 교포 선수도 단일팀 소식을 접한 뒤 협회 관계자에게 "남북 단일팀이 정말 한국민이 원하는 거냐, 혹시 여자 대표팀에 미국·캐나다 출신은 있는데 북한 선수가 없어 화가 난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5월15일 충청북도 진천 선수촌에서 아이스하키 올림픽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체력 훈련을 받고 있다. /장련성 객원기자
도종환 신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면서 '남북 단일팀'은 안 하면 안 되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단일팀 논의에서 당사자인 대한아이스하키협회나 지금껏 땀을 흘려온 선수들이 철저히 배제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B선수는 "훈련장에 찾아와 위로나 양해를 구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게 너무 화난다"고 했다. 협회 역시 단일팀과 관련해 정부로부터 논의나 조언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단일팀 논의가 아무리 중차대하다 해도 필수적인 절차가 빠져 있는 것이다.

1991년 단일팀 '코리아(KOREA)'가 출전한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남북 선수단이 손을 맞잡고 공동 입장한 2000년 시드니올림픽은 스포츠가 만들어 낸 위대한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잠시 빛을 내다 사라지는 '전시(展示)'적 상징으로만 남았고, 남북 관계는 정권에 따라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면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새 정부는 이번 단일팀 제안을 통해 남북 대화를 위한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그 취지에 동감하더라도 선수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 있을까.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의명분만 앞세우고 그간 목표를 위해 뛰어온 이들이 흘린 땀은 그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남북 단일팀을 추진하는 정부에 권하고 싶다. 태극 마크를 달기 위해 이 악물고 달려온 선수들을 한 번이라도 찾아가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26/2017062603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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