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웜비어 사망 사건'의 證言… 북한 내 최장기 미국인 억류자 케네스 배]

"방북한 농구스타 로드먼은 CNN이 내 석방 문제 묻자
'케네스 배가 北에서 뭘 했는지 알기나 하냐'고 힐난조 답변"

"왜 美 정부에서 잠잠한가
2009년 여기자들 사건 때는 빨리 빨리 움직였는데
너를 중시하지 않는 것 같다"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케네스 배(배준호·49)는 ABC, NBC, CBS, CNN 등 미국 TV 방송에 잇따라 출연했다. '오토 웜비어 사망 사건'으로 북한 내 최장기 미국인 억류자였다가 풀려난 그의 존재가 부각됐던 것이다."내가 석방된 뒤로 아무도 못 풀려나다가 2년 반 만에 오토 웜비어가 혼수상태로 나와 허망하게 죽었다. 나 같은 선교사처럼 신념에 의해 그랬던 것도 아니고, 북한에 놀러 갔던 한 대학생이 그까짓 포스터 한 장 뗐다는 이유로 말이다."

케네스 배는 국가전복죄로 체포돼 15년 노동교화형을 받아 735일 만에 북한에서 풀려났던 인물이다. 그는 재미(在美) 선교단체 소속으로 2010년부터 중국 단둥(丹東)에서 북한 관광 전문 여행사를 운영했다. 세계 각국의 기독교인 관광객을 인솔해 17차례 방북했다. 2012년 11월 3일, 18번째 방북이었다. 그를 포함해 일행 6명은 단둥에서 열차로 옌지(延吉)까지 갔고, 다음 날 새벽 6시 버스를 타고 북한으로 들어갔다.

"오전 10시쯤 북한의 나진·선봉 세관을 통과할 때 컴퓨터 외장 하드가 문제가 됐다. 그 안에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제작한 북한 다큐멘터리 동영상과 사진, 문서 파일이 들어 있었다. 다큐멘터리에는 굶주린 꽃제비가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장면 등이 나왔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리고 작전'이라는 제목의 선교 편지였다. 여리고성(城)을 차지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그 둘레를 걸었던 것처럼, 북한 여행 동안 기도하면 어둠의 장벽이 무너질 거라는 취지였다. 북측은 이를 실제 '군사작전'으로 여겼다."

―조사 과정에서 구타나 고문 등 가혹 행위는 없었나?

"그런 것은 없었다. 다만 잠을 서너 시간만 재우고 하루 종일 세워놓거나 꿇어앉히는 기합을 받았다. 처음에는 CIA나 국정원의 사주 여부를 집중 추궁했다."
 
케네스 배는“억류 전에는 북한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정말 피상적인 지식이었다”고 말했다.
케네스 배는“억류 전에는 북한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정말 피상적인 지식이었다”고 말했다. /조인원 기자
―북한에서는 '6·25전쟁 이후에 붙잡힌 미국 국민 중 가장 위험한 짓을 한 사람'이라고 했다는데?

"나 혼자서 선교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훈련했고, 여행사를 통해 사람들을 모집해서 조직적으로 북한 선교를 위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국가전복음모죄에 해당한다고 했다."

―본인도 그 죄목을 인정한 것으로 아는데?

"처음에는 버텼다. 3주쯤 됐을 때 조사관이 '좋은 소식이 있다. 진술서에 서명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당초 오해로 빚어진 사건인 만큼 북한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걸로 생각했다. 그 뒤 평양으로 옮겨져 당구대와 사우나 시설이 있는 보위부의 안가에 거처했다."

―곧바로 석방이 안 됐는데?

"북한이 광명성 3호(장거리미사일)를 발사하고 한 달 뒤에는 핵실험까지 했다. 미국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게 영향을 미쳤다. 조사관이 '성난 군중이 당신을 죽여 묻어버릴 수 있다' '미국과 전쟁이 나면 전범으로 취급하겠다'고 말했을 때, 내가 인질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보위부 안가에서는 일종의 대기 상태였다고 봐야 하나?

"그런 셈이다. 중국 단둥에 있는 아내와 통화가 이뤄졌고 한 달에 한두 번 서신 왕래도 했다. 조사관은 '당신 가족에게 제발 구해달라고 미국 정부에 사정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라'고 했다. 당시 내가 구출을 읍소하는 인터뷰 화면도 공개됐다."

안가에서 저녁이면 김일성 일가를 찬양하는 TV 프로그램을 시청케 하고 김일성 회고록도 읽게 했다. 체포된 지 다섯 달쯤 지나 검찰이 그를 기소했다. 2013년 4월 재판이 열렸다.

―검사가 있으면 변호사도 있었나?

"재판이 열리기 전 조사관이 '변호사를 선임하겠느냐'고 물었다. 선전용으로 그렇게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변호사를 만나보고 결정해도 되느냐?'고 묻자 '만나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 언제 변호사를 만나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재판 당일에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변호하겠다고 했다."

―몇 차례 재판이 열렸나?

"한 차례였다. 검찰 심문과 구형, 최후 변론, 판결이 한 번에 이뤄졌다."

―어떻게 자신을 변호했나?

"검사가 '15년 노동교화형'을 구형하고서 내가 3분간 마지막 변론을 했다. 보위부 안가에서 읽었던 김일성의 '세기와 더불어'를 인용했다. '수령님이 말씀하시기를 사상·문화 배경이 달라도 민족 번영을 위한 일이라면 누구와도 손잡을 마음이 있다고 했다.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민족이 잘되고 통일이 되기를 원한다. 해외에서 그런 교량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재판관은 검사 구형대로 15년을 선고했다."

―15년을 선고받았을 때 심정은?

"당초 사형 내지 무기징역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15년형이어서 오히려 안도했다."

―항소는 안 했나?

"국가전복죄의 경우 단심제(單審制)다. 재판 전에 검사가 '몇 년 판결이 나오는 건 중요하지 않다. 이번 행위는 남조선의 반공 교육과 서방 언론의 왜곡된 선전, 잘못된 신앙 때문에 비롯됐다. 하지만 옆집 아이가 유리창을 깼을 때 부모가 시인하고 사죄하고 보상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가 인정하고 사죄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상하면 된다. 모든 게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했다. 미국을 끌어내기 위한 카드로 여겼다."

그는 평양 외곽에 있는 외국인 전담 교화소에 수용됐다. 화장실과 침대가 있는 독방이었다. 당시 수감자는 그 혼자였다고 한다.

"탈북자들이 고발하는 수용소 실태에 비교하면 좋은 시설에서 대우 받은 게 사실이다. 3명이 한 조로 종일 감시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주 6일을 노동했다. 콩밭에서 일하거나 석탄 창고에서 석탄을 나르는 등의 노역을 했다."

―노동 자체로만 보면 특별할 것은 없는데.

"내가 당뇨 등을 앓았고 이런 식의 노동에 익숙하지 않아 힘들었다. 여름에는 불볕더위 속에서 노동해야 하니 2L짜리 주전자 물을 서너 통 마셔도 오줌이 안 나왔다. 체중이 27kg이나 빠지기도 했다. 한 달 반쯤 지났을 때 책임검사가 찾아와 '왜 미국 정부에서 잠잠한가. 2009년 여기자들 사건 때는 빨리빨리 움직였는데(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특사로 방북해 억류된 미국인 여기자 2명이 풀려남), 너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요시하는 것 같지 않다. 내가 6, 7년이면 은퇴하는데 그때까지 교화소에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식으로 말했다."
 
북한 억류 당시의 케네스 배
북한 억류 당시의 케네스 배. /AP 연합뉴스
―6·25 이후로 북한 내 최장기 미국인 억류자로 기록됐는데?

"교화소에서 있으면서 지병으로 네 번이나 병원에 입원했다. 간수나 병원 직원들과 친해지면서 대화도 나누고 여러 상황을 접하게 됐다. 억류 전에 17번이나 북한을 왕래하면서 어느 정도 북한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정말 피상적인 지식이었다. 2년 동안 억류되면서 북한 주민이 얼마나 통제되고 조종되고 말할 자유가 없고 자기가 원하는 걸 할 수 없는지 그 실상을 알게 됐다."

―'북한 전체가 거대한 감옥'이라고 표현했는데?

"내가 교화소에 갇혀 있는 처지처럼 2400만명의 북한 주민도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재미동포 아줌마'라는 신은미씨와는 북한을 보는 관점에 차이가 큰데?

"나도 여행객으로만 다녀갔으면 북한이 보여주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 북한 정부의 대접을 받게 되면 비판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2014년 초 김정은 생일을 맞아 방북한 농구스타 데니스 로드먼이 당신의 석방에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데니스 로드먼은 평양에서 화상으로 CNN 기자와 인터뷰했다. 기자가 나의 석방 문제를 언급하자, 데니스 로드먼은 '케네스 배가 북한에서 뭘 했는지 알기나 하느냐'고 힐난조로 답했다. 이런 미친 발언이 오히려 나에 대한 세상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2014년 11월 8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특사인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의 방북으로 그는 풀려났다.

―석방된 뒤 '왜 그런 나라에 들어갔느냐. 경솔한 행동으로 여러 사람을 애먹였다'며 당신에 대한 비판은 없었나?

"그런 인터넷 댓글이 달렸다. 내 석방을 위해 전용기와 함께 스무 명의 정부 관리가 와 있었다. 너무 고맙기도 하고 한편 죄송스러웠다. 당초 내가 억류됐을 때 중국 주재 미국 영사가 아내를 찾아왔다. 아내가 '이런 문제를 일으켜 죄송스럽다'고 말하자, 그는 '설령 살인죄를 저질렀어도 자국민 보호를 위해 미국 정부는 모든 걸 다 한다'고 했다."

―작년에 '잊지 않았다(Not Forgotten)'라는 북한 억류기를 출간했는데?

"친북 인터넷 사이트에는 '네 목에 스스로 올무를 걸었다'는 식의 글이 실렸고, 유튜브를 통해 '가롯 유다처럼 배신한 너를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미 정부에 '케네스 배가 떠들면 더 이상 석방 교섭이 없다'고 하자, 이에 대해 미국 측은 '개인의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한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나는 북한에 남아있는 억류자들의 신변을 염려해 활동을 중지했다."

―이번에 성명서를 내고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하고 있는데?

"나 뒤로는 석방된 사람이 없다가 북한 억류 17개월 만에 오토 웜비어가 혼수상태로 풀려나온 뒤 숨졌다. 미국인들의 충격이 어떻겠나. 나도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한 청년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북한에 억류돼 있는 분들이 풀려나도록 해야 한다. 북한 주민들도 평생 그렇게 살고 있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잊히지 않도록 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는 작년 10월 한국에 정착했다. 탈북자 정착 및 탈북 자녀 지원을 위한 북한인권단체 '서빙 라이프'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프로야구 초창기에 빙그레 이글스와 MBC 청룡 감독을 지낸 배성서씨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25/2017062502070.html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